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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12.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미운 놈 떡 하나 덜 준다

 우리 옛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곧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라도 더 줘야 그나마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일 게다. 그런데 이 속담이 우리네 삶 속에서 그대로 적용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신도 아니요, 도 닦은 스님도 아니요, 그저 험한 세상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또 다른 예로 “누군가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내어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 역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와 닿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솔직히 내 평생, 이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상대방의 몰상식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더라도 그냥 참거나 스스로 치유하는 게 가장 최선의 방법일 뿐, 굳이 그 상대방에게 떡 하나 더 주지는 않을 것이다. 글쎄, 모르겠다. 상대방이 그런 마음을 알고, 뭔가 달라지면 떡 하나, 아니 그 이상도 줄 수 있을지.


 사람들의 심리를 보면 자신에게 만만한 사람이 그 무언가를 해줄 경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더 바라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자. 그런 상황에서 누가 기분이 좋겠으며, 또 더 잘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겠는지. 아마도 괘씸한 마음에 해준 것을 다시 물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는 말은 미운 놈이 그 떡을 먹고 그나마 예쁜 놈으로 바뀔 조짐이 보일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물론 상대방에게 그 무언가를 베풀었을 때, 그 고마움을 알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중요한 건, 아무리 상대방이 하찮고, 만만해도 그 무언가를 받았을 때는 고마움의 표시는 기본이다. 그런데 그 기본조차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친한 지인이 자신의 아버지가 원망스럽다며 이런 얘기를 꺼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언니가 홀로 사는 아버지를 위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챙기는 스타일인데, 한 번은 아버지가 언니가 없을 때 넌지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네 언니가 나한테 해주는 게 뭣이 그리 대단하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그때 지인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나마 자신은 바쁘다는 핑계로 밥만 사는 정도고, 자신의 언니는 그래도 몇 가지 반찬들과 다양한 먹거리들을 챙겨서 푸짐하게 준비를 해주는데,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게 너무도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아버지, 언니처럼 저렇게 꼬박꼬박 챙겨주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에요. 저는 바빠서 그렇게도 못하는데……….”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 지인은 시댁과 아주 가까이에 있어서 1주일에 한번 시어머니를 초대해 식사 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만만해서인지 매번 식사자리에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반찬을 사서 먹는다느니, 국이 너무 싱겁다느니, 쌀이 너무 입에서 겉돈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고, 결국 식사 대접은 물론 시어머니를 향한 마음의 문까지 다 닫아버렸다고 한다. 사실 그 지인은 1주일에 한 번씩 나름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상을 차렸다고 하는데, 거기에다 대고 온갖 불평, 불만을 늘어놓았으니 그 누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끝까지 부으려고 하겠는가!


 따라서 그 지인은 더 이상 자신을 지치게 하는 일을 안 하기로 마음먹고, 지금은 그냥 나가서 사 먹는다고 한다. 물론 처음엔 시어머니도 서운했겠지만 지금은 나가서 먹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고, 그 지인 또한 마음의 행복을 찾아가면서 오히려 시어머니를 향한 미운 감정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기보다는 덜 줌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의 기대치를 떨어뜨려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 집착에 대한 원망 또한 사라져 서로가 편안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옛 사자성어에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는. 이처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미우면 미운만큼의 대접을 해줘야만 상대방도 그것을 깨닫고, 더 이상의 불합리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사실 나도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입장으로써 우리 가족 이외에 또 다른 사람들을 챙긴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어떤 때는 내 가족, 아니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 지인이나 그 지인의 언니 또한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아버지나 시어머니를 챙겨주고자 갖은 노력을 다 했는데, 오히려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다니 제삼자인 나로서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부분이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해줘야 만족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솔직히 베푸는 입장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 때문에 지치고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엔 빈 항아리를 보면서 원망만 남는 것이다. 그러니 그 미운 마음에 어떻게 떡 하나 더 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미운 놈 떡 하나 덜 주기로. 참 이상한 게, 사람들은 그 무언가를 베풀었을 때 보답은 고사하고 고마움의 표시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오히려 툴툴거리며 그 이상의 것을 바랄 때가 있다. 물론 그런 경우는 편한 관계, 특히 가족 간의 관계에서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누구나 다 들어본 고급 메이커 옷을 사주기라도 하면 그다음엔 그 메이커보다 더 비싼 메이커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온갖 원망과 탓이 돌아오기도 한다. 따라서 해주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부담감이 커지고, ‘괜히 사 줬나?’ 하는 후회감이 밀려올 수밖에 없다. 사실상 매번 그 이상의 것을 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칫 가정 경제에 큰 타격이 가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마저 뒤따르곤 한다.


 나 같은 경우도 가뜩이나 사춘기로 인해 말과 행동까지 밉게 하는 둘째 녀석이 매번 부담스러운 요구를 해 와서 한때는 무척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나마 말투라도 고분고분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주고 싶겠지만 그것도 아니니 얼마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겠는가! 사실 그런 사춘기 아이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는 집안 분위기 또한 살벌해져서 마지못해 들어주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렇다고 행복해하거나 감사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잠시 불평, 불만만 수그러들 뿐, 이후 또다시 시작이다. 그러니 베푸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지치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난 생각을 달리 했다. 일종의 거래를 하기로 말이다. 그러니까 부담스러운 그 무언가를 요구했을 때, 곧바로 들어준다거나 아니면 티격태격 신경전을 벌이느니 매달 주는 용돈에서 차감하는 식으로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기분 상하지 않는 선에서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용돈 일부를 담보로 원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 또한 경제적, 정신적으로 남는 장사를 하는 셈이다. 


 어찌 됐든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다가 어느 순간 그 미운 놈이 분노의 대상이 되어 결국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치닫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신이 아니다. 누군가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내어줄 수 있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내 마음이 행복해야 다른 사람에게도 그 행복이 전해질 수 있기에 상대방의 몰상식한 말과 행동에 과감히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줌으로써 내가 지치고 힘들다면 그다음엔 아예 안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상대방도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떡 하나를 그리워하며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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