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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11.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암이 부른 건강

 그냥 담담했다. 환자용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향하던 그 당시 나의 심정은. 대부분 수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수술실 문이 열리는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편안했다. TV에서나 보았던 수술실 내부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누워있는 수술대 위에는 마치 주인공을 향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듯 온갖 조명들이 비추고 있었고, 담당 주치의를 비롯한 병원 관계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난 깊은 심호흡과 함께 ‘나’라는 존재와 잠시 이별을 경험했다. 그 무엇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나를 찾아가면서 주변의 소음들이 하나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긴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때 간호사들의 다급했던 목소리, “어머! 어떡해. 저분은 마취에서 안 깨어나. 누가 마취과 선생님 좀 빨리 불러줘.”라는. 그 이후로 어떻게 됐을까? 그 당시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았던 그분은…….


 수술을 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어섰다. 갑상선암이었다. 그 당시 첫째 딸아이와 둘째 녀석은 엄마 손이 많이 가는 6살, 4살이었다. 그렇게 난 눈에 밟히는 아이들을 친정에 맡겨둔 채 갑상선암 수술을 받으러 간 것이다. 수술 전 입원부터 퇴원까지는 약 1주일가량 걸렸을까? 몸도 몸이지만 한동안 목소리가 전혀 나오질 않아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직도 목에는 그 당시 수술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보통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스카프나 목걸이로 살짝 가리기도 하는데, 난 목에 뭘 두르는 게 번거로워서 늘 그냥 다니곤 했다. 여하튼 나에게 찾아온, 그리 반갑지 않은 갑상선암을 처음 발견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아이들 육아로 지치고, 가까이에 있는 시댁 눈치 보느라 무척 힘이 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 무엇 하나 자유롭지 못했던 난 숨이 막혀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몸에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 콧물이 난다든지, 목이 아프다든지, 계속해서 재채기를 한다든지, 으슬으슬 춥다든지 하는 감기 증상이라곤 전혀 없었는데, 열이 38도까지 올라간 것이다. 처음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참았다. 그런데 하루, 이틀……. 1주일이 지나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때 사람의 정상 체온인 36.5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38도로 1주일을 버티는 동안 거의 지옥을 오갔으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이 다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정도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결국 병원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폐 한쪽이 아예 하얗게 변해있었다. 그러니까 폐렴 직전까지 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폐의 염증은 3일 정도 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호전이 됐지만 초음파 검사를 통해 목 부분에서 혹이 발견된 것이다. 담당 의사는 혹 모양이 이상하다며 대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언젠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 목 부분에서 이상한 증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목 전체가 마비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여하튼 꺼림칙한 마음으로 대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받았다. 지금도 생각난다. 마취 없이 긴 바늘을 목의 갑상선 부분에 찔러 넣어 조직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순간 쇼크를 먹어 얼굴이 하얗게 변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직 검사 결과는 예측한 대로 갑상선암이었다.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러 다닌다. 물론 10년 넘게 피검사와 초음파 검사를 꾸준히 받아왔지만 아무런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사실 수술을 받은 이후로 한동안은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굉장히 피곤한 부분도 있었다. 가려야 할 음식은 물론 반드시 섭취해야 할 음식들도 많았고, 면역력 보강을 위해 운동은 필수에다가 이래저래 조심하라는 경고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솔직히 내 성격은 모범적인 성격이 못 된다. 그러니까 갑상선암에 좋다고 해서 무조건 따르는 스타일도 아니고, 반대로 갑상선암에 나쁘다고 해서 무조건 멀리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냥 내가 좋으면 선택하는 것이고, 아니면 말면 되는 것이다. 다만,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진다. 만약 내 멋대로 했다가 암이 재발될 경우, 그건 당연히 내 책임인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수술 이후로 지금까지 심하게 감기 한번 걸려본 적이 없다. 물론 약 먹고 조금 있다가 뚝 떨어지는 감질나는 감기 증상은 몇 번 있었다. 그래도 지독스러운 감기로 인해 만사가 다 귀찮아지는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은 하지 않았다. 가끔씩 주변 지인들이 이렇게 묻곤 한다. “아니, 왜 그렇게 건강해요? 아픈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심지어는 가족들조차도 나를 이상하게 바라볼 때가 있다. 남편을 제외한 아이들은 두통이니 감기니 하면서 계속 골골거리는데, 정작 엄마는 갑상선암에 걸렸는데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 그야말로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따로 보약이나 건강보조식품을 먹는 것도 아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먹어야 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편이 홍삼을 구입해 와 억지로 먹으라고 한 적도 있다. 오죽했으면 그럴까 싶기도 한데……. 


 사실 암 선고 전에는 내 주변 환경이 그리 편하지 않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 스스로도 적응하기를 거부했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 또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그런 내 마음을 속여가면서 가식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서히 마음의 병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 마음의 병은 결국 몸을 뚫고 암이라는 부정 덩어리를 만들어 낸 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보면 이제부터라도 삶을 보다 솔직하고, 나답게 살라는 경고였던 것 같다. 이후로 난 달라지고 싶었다. 아니, 무조건 달라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그저 겉도는 삶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병은 곧 몸의 이상 신호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감정들, 특히 억울함,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상대방의 이기적인 말과 행동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가 왜?”라는 억울함이 계속해서 쌓이게 되는 것이고, 결국 그 억울함은 엄청난 분노로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왜 억울한지, 왜 분노가 치솟는지에 대해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얘기해 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평등관계가 됐든 수직관계가 됐든 마찬가지다.


 물론 상대방에 대한 부당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솔직히 그냥 참고 있을 뿐, 마음속에는 ‘분노’라는 감정이 점점 쌓여가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만약, 상대방에게 억울함이나 부당함을 간절히 호소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아예 깨는 게 낫다. 굳이 그 사람과의 인연을 이어가면서까지 자신의 삶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피폐하게 만들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나답게 사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삶의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암 선고 이후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같은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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