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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Aug 14. 2022

비 오는 날, 고양이

순식간에 좋아해 져 버렸어 



비가 많이 오는 날, 집으로 오는 길,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세를 낮추고 숨을 죽이고,  

왔던 길을 돌며 주변을 맴돌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울음소리의 진원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바짝,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두리번거리기를 여러 번,


 

비는 조금 더 거세게 쏟아지고 

마음은 바빠지고 

이런저런 소음들에 분별이 어려운 상황.


 

이제 정말로 포기하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저기, 동그랗고 촘촘한 나무 밑에, 

손바닥만 한 아기 고양이가

비를 쫄딱 맞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고양이는 고양이인데 

물에 빠진 생쥐라는 게 딱 이 모양.


나도 모르게 고양이를 안긴 안았는데

어쩌지, 어떡하나... 싶었다.


 


불안과 두려움, 

차가움과 어둠으로 잠식된 심장,

빠르고도 가느다랗게 뛰는 

하지만 여전히 따스한 감촉의 심장이 

내 손바닥에 닿는다.


 

이런 순간에 나란 존재란,

그저  떨고 있는 한 존재를 안고 있는 

손바닥,으로 수렴되는 듯하고


 

그렇게 고양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오는데

마음이 복잡하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 

한 문장만 외우며 집으로 간다.


‘비를 피할 때까지 만이야.'

'목을 축여줄 때까지 만이야.'


 


나는 내 사랑의 범위를 안다.

범위 안에서만 사랑을 해야 한다. 


 

 


현관문이 열리고

아이들은 내 품에 안긴 고양이를 보고

온 세상이 열린 얼굴로

폴짝거린다. 


 


 

나는 또 주문을 외듯

준비한 대사를 소리친다. 


 

‘얘들아

비를 피할 때까지 만이야. 

참치와 우유만 먹이고 

다시 그 자리로 데려다 줄 거야.’


 


애정의 범위를 미리 상정해야,

무책임한 사랑을, 무분별한 사랑을,

그리고 그런 사랑으로 인한 상처의 파급을 

예방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랑을 많이, 

아주 많이 들어왔고,

그런 사랑의 잔재들에 오래 아파했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틈새를 찾아,

더 많은 사랑의 가능성을 향해

우리를 언제고 무장해재 시키고

이성과 논리와 기준을 마비시키곤 했다.


 

나는 이런 나의 취약성을 잘 알고 있고 

잘 다스리려 애쓴다.


그게 잘 될 때도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도 하고

가까스로 잘 해내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잘 분류하고 잘라낸 것 같은

사랑의 절단면에, 

그 보이지 않은 파급들에,

안으로 오래 삭히고 시달리기도 한다.


 

내 사랑엔,

그래서 형식이 중요해졌다. 



 


나도 마냥 사랑에 무책임할 수 있고

무분별할 수 있고, 사랑에 비연속적인

융단 폭격을 가하는 스타카토 사랑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이 고만 싶지만


 


나는,

어느 정도 사랑을 해봤고

사랑에 아파봤고

여전히 사랑에 서투를 때가 있고

때때로 내 안에서 사랑이 삐쳐나갈 때는 

속수무책이긴 하나


적어도 

내 사랑의 범위를 조금은 더 알고 있으며

그래도 그 모든 사랑의 격랑과 파도,

높이와 깊이와 연속선과 불연속선에 대해서

이리저리 살펴볼 수 있는

어른의 높이와 깊이, 

품과 선을 연습해왔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옆에서 나는, 

그나마 사랑 관리능력이 있는

어엿한 어른이 된다. 


 


 



나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고양이의 털을 

일단 타월로 닦아주고, 

고양이를 품에 한 번씩 안아보기를 원하며

아옹다옹 다투는 아이들을 보며

미음을 가다듬는다.


 



내 사랑을 관리하며

내 아이들의 사랑도 관리하는 일을 동시에 

사랑을 수행해야 하는

어른의 책무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얘들아

비를 피할 때까지 만이야. 

참치와 우유만 먹이고 

다시 그 자리로 갈 거야.”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기 고양이는,

나에게 그랬든, 

아이들에게도 잘 안겼다.


 


 

젖은 털이 마르고 

아이들의 심장에 자신의 심장이 닿을수록

활기를 느꼈는지

집안 곳곳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아이들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적당히 잡혀주며 아이들과 놀았다.


 


고양이의 습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는,

고양이가 경계하지 않자,

안도하는 동시에 불안해졌다.


 


 

애착은 때로 무서운 것이었다.

정이 든다는 건, 길들여진다는 건

때로 정말이지  무서운 사건이었다.


 


비가 잦아들자마자 나는 

아이들과 고양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더 정이 들기 전에 고양이를 

본래 있었던 그 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양이도 우리도 

서로가 서로에게 깊이 연루된다.

길들여지고 만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 좋은 일, 

사랑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사랑에는 

약속과 책임과 분별이 필요하다.


 

‘임시보호’라는 거치대를 통해

우리가 만났지만

임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작별은 어려워진다.


 

상처를 너무 예방만 해도

사랑이 들어올 통로가 막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고양이를 위해, 우리를 위해

딱딱하게 선을 긋기로 한다.   


 





다행히 고양이를 다시 그곳에 데려다주면서

몇 가지 조건들이 

우리의 작별을 더 쉽게 만들어주었다.


고양이 아줌마를 만났고 

아줌마는 처음 보는 고양이지만 

엄마가 있는 고양이임을 확신하셨다.


 “아유, 엄마랑 아주 똑같이 생겼어.”


고양이가 아이들을 따르는 모습을 보니 

고양이 카페에 사진을 올려 

입양을 시키기도 순조로울 것 같다며 기뻐하셨다.



“근데 자기가 키우면 안 돼?"


 


내 마음속 아이는, 나의 아이들과 합창하며

‘그럴게요’,라고 외치고 싶어 했지만

나는 세 아이들의 손목을 붙들고 계단을 올라오며

눈인사를 했다.


 “좋은 사람들 만나야 해.

넌 사랑스러우니까 

사랑 많이 받으면서.”


 

고양이는 계단 앞에서 넘어지면서도

우리를 따라오고 싶어 했다.


 

아이들은 웃으며 

고양이와 작별 인사를 했다.


 “엄마, 고양이가 

우리를 정말 좋아하나 봐.”


 

'우리도 너를 정말 

순식간에 좋아해 져 버렸어.' 


 


그 후 며칠 동안 아이들은 나에게

고양이의 안위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실이길 바라는 말을 했다.


 

아기 고양이가 너희 같은 아이들을 좋아해서

서로를 충분히 오래오래 좋아할 수 있는

좋은 곳에 잘 입양되어 잘 살고 있다는 말을

'미리' 해주었다.


 

때로는 사실보다 사실이길 원하는 이야기가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제 매일 

괜히 숨죽이고 두리번거리고  

뒤돌아보는 구간을 

서성이고 지나친다.

비가 오는 날엔 더더욱,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고,

아기 고양이가 폴짝 거리며 재롱을 부리던

그 모습이 앞에서 펼쳐지는 것만 같은

착시와 환청과 착각 속에서

작은, 아주 작은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심장이 뛰는 소리를 손바닥으로 만질 기회를 준

작은 생명체가 우리 내면에 지우는 어떤 각인은

생각보다 깊고도 길다.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각인이다. 


 

그 마음은 우리 안에서 

희미한 통증을 발산하며,

그전부터 우리 내면에 이미 있었던

(때론 있는지도 몰랐던) 

다른 통증을 일깨우기도 한다.


 


 


아이들은 가끔 

우리 곁에 잠시 머물렀던 생명체들이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를 묻는다.


 

하루 동안의 일상에서 복닥이던 겉표면의 의식이

밤의 잠 속으로, 무의식과 꿈의 세계로, 진입하기 직전과 같은

어떤 전환기에 떠오르는, 몽롱한 질문들이다.


 


 

“엄마 그 고슴도치는 어디로 갔을까?”


(영국에 있을 때 우리는 고슴도치를 구조한 적이 있다. 

하루 동안 도치는 내가 글을 쓰던 서재의 책상 밑에서, 우리가 임시로 만들어준 박스 안에서 잠을 잤다.

그날 오후 동안 우리는 고슴도치 보존 단체의 친절한 요원에게 여러 지령을 받았다.  )





 "그 비둘기는 살 수 있었을까?"



(단지 죽음을 유예시키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날개를 다친 작은 비둘기가

 도로 중앙이 아닌 도로가 아닌 길로 가기를

계속 뒤에서 지켜보며 같이 응원하던 시간이 있었다)


 


“고양이가 원래는 네 마리였는데 

두 마리가 되었다가,

결국 한 마리만 살았던 거잖아. 

근데 내가 걔를 소풍 갔다가 다시 만났어. 

거기에서 아기 고양이들과 살고 있더라고.

이름을 부르니까 눈을 찡긋하며 인사하던걸.”


 

(공장에 버려진 고양이 네 마리에서 시작된,

끝을 낼 수 없는 우리의 고양이 이야기다.) 

 



지금 여기엔 없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마음을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나누게 되었던

때론 격렬한 마음을 건넸던 어떤 존재들. 


 


아이들은 그 존재들에 대해, 

이따금씩 앞뒤가 맞지 않은 기억들과

자신의 상상과 욕망과 두려움을 가미한 

감정과 생각의 파편들을 나열하다가

잠이 들곤 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이 지구 상에서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의식과 기억과 감정과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기 시작한 이래,

어느 날 어떤 때에, 곁에 머물렀던,


말로 소통을 할 수는 없어서 

그들이 정말로 어떻게 느꼈는지는 

끝끝내 알지 못할, 

하지만 알 수 있다면 알고 싶은 

병아리들과 고양이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심장 소리를 기억한다. 

감촉한다.  


 

또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지만 

내가 아주 많은 진심의 마음을 주었던 

많은 무생물의 대상들과 그들의 목소리도 

내 마음의 책장 어딘가에 나열해보게 된다. 


이제는 만질 수 없는

나의 인형들, 책들을.


 


나에게는 너무 진심이었기에 

이제 다시는 그때의 첫 진심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애착할 수 없는,


내가 키웠지만 

사실은 나를 키워준 

그 모든 무수한 존재들을 생각한다. 

그리워한다.

그리고 속삭인다.


 


 '안녕 hi. 안녕 bye.

보고 싶다.' 


 


 

시간은 항상 앞으로만 나아가는데 

기억은 전방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 

나는 자주 '보고 싶다'라고 혼잣말을 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뒤에서 얻으려 애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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