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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Jun 05. 2020

#13 헤비 북패커의 실망, 대실망!

삼일에 한 도시, 서점은 반드시


여행을 자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패턴이 하나 생겼다. 어느 도시에든 3일 이상 머무를 경우 비슷한 일정과 비슷한 활동 범위에 맞춰 시간을 보내는 습관이 생긴 거다.


첫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도시를 걸어서 둘러본다.
둘째 날. 지역 관광지 또는 유적지에 들른다.
셋째 날. 빈 가방을 메고 숙소를 나와 서점에 들른다. 서점에서 그 도시 또는 나라와 관련된 책을 구입한다.
*만약 일정이 짧아 주요 관광지를 둘러볼 여유가 없더라도 서점에 들르는 일은 거르지 않는다.


이런 습관 때문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어김없이 난감한 상황을 만난다. 이곳에서 한 권, 저곳에서 한 권 사모으다가 어느새 캐리어 바퀴가 내려앉도록 가득 모인 책들을 가져갈 때가 온 것이다. 책을 보고 있으면 내 자식 같이 뿌듯하면서도 ‘집까지 어떻게 들고 가지?’하는 생각에 벌써 온몸에 땀이 난다. 헤비 북패커(heavy bookpacker)에게 현타가 오는 순간이다.  

그래서 도저히 감당이 안될 것 같은 상황에서는 국제택배를 집으로 먼저 보내기도 했다. 남은 일정을 소화하고 드디어 집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혹시나 오는 길에 젖지는 않았을까?' '혹시나 배송 착오로 북한으로 가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걸 생각하면 홀가분해진 어깨가 사실 그리 반갑진 않았다.




그 험난한 귀환을 마치고 집에서 다시 영롱한 책들을 만나면 그동안의 무겁고 힘들었던 순간도 다 사라진다. 이 맛이야. 차라리 개가 똥을 끊지, 헤비 북패커는 책을 끊을 수 없다.

이제는 아예 여행을 떠나기 전에 구글 지도를 열어 '서점'을 가장 먼저 찾을 지경이 되었다. 'bookshop'으로 검색을 시작해 현지어로 '서점' '책'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방문할 도시에서 모든 관광과 여행 일정은 방문할 서점 위치에 따라 정해진다.


캄보디아에 처음 갈 때도 그랬다. 앙코르 와트를 본다는 부푼 기대 한편으로 역시나 헤비 북패커로서 이미 캄보디아 서점에서 탕진잼을 즐기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캄보디아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을까?’ ‘캄보디아 문자로 된 책은 어떤 모습일까?’


씨엠립에서 맞이한 둘째 날, 앙코르 투어를 마치고 아직 해가 지기 전에 낯선 도시를 산책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옷가게 사이에서 낡은 책 더미를 발견했다. 신나는 마음으로 달려가 보니 익숙한 글자가 가득했다. 그곳은 영어와 유럽권 언어로 된 책들을 쌓아놓고 파는 중고서점이었다. 거기서 한 블록 지나 만난 다른 서점도 유럽어권 책만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씨엠립의 한 중고서점. 벽면에 적힌 문장이 인상적이다. ⓒ2017 Noh Sungil.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의 한쪽만을 읽을 뿐이다.


"The world is a book people who don't travel only get to read one page." 서점 벽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캄보디아행 비행기를 탔는데, 라틴알파벳만 가득한 서점이라니…. 실망스러웠다. 지도에는 씨엠립 시내에 서점이 여기 두 곳밖에 없다고 했다. 씨엠립이 유럽에서 워낙 유명한 관광지여서일까? 벽에 쓰인 문장이 환영하는 수많은 백패커를 위한 책들은 가득했지만 정작 캄보디아인을 위한 책은 없는 이상한 풍경이라니.



크메르 문자가 적힌 책을 사고 싶었던 헤비 북패커의 소원은 씨엠립 중심가를 벗어나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평소 조용한 환경을 선호하기에 앙코르 투어를 사전에 준비하면서 숙소는 일부러 시내를 피해 잡았다. 3일간의 앙코르 투어를 모두 마친 다음날, 며칠 전부터 지나가며 눈여겨봤던 동네 카페에 앉아 앙코르 투어를 정리하고 있었다. 자리 앞쪽에 크메르 문자로 쓰인 책이 수북이 쌓인 책장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카페 주인에게 물었다.

“저기 있는 크메르 문자로 쓰인 책들은 어디서 구입할 수 있나요?”

“여기서 두 블록만 가면 서점이 있어요. 저는 주로 거기에서 삽니다.”

그는 친절하게 약도를 그려주며 안내해주었다. 거리로 나와 한창 공사 중인 두 블록을 금방 도착한 서점은 1층에는 문구점, 2층에는 서점을 겸하고 있는 구조였다. ‘아, 여기는 문구점이라서 지도에 안 나왔구나!’


씨엠립 외곽에 있는 서점. 이곳에서 크메르 문자로 된 책을 처음 만났다. ⓒ2017 Noh Sungil.



서점에는 크메르 문자로 적힌 책이 가득 있었다. 다양한 장르가 찾아보기 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천천히 둘러보다가 실망스러운 마음이 커져갔다. ‘생각보다 디자인이 별로인걸? 인쇄 퀄리티도 너무 안 좋잖아. 태국이나 베트남처럼 동남아시아 다른 나라에서 봤던 책들과는 많이 달라.’


서점에 진열된 크메르 책. ⓒ2017 Noh Sungil.


교과서 코너를 둘러보면서 깜짝 놀랐다. 대충 복사해서 스테이플러로 찍은 조그만 책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복사 질이 좋지 않아 군데군데 흐리거나 잉크가 떨어져 나간 글자, 읽을 수 없을 만큼 작은 글자 크기에 놀랐다. ‘다른 책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책 모양을 갖추고 있던데 이 교과서들은 왜 이러지?’ 복사판들을 둘러보다가 옆에서 조금 더 크고 훨씬 좋은 퀄리티의 같은 교과서를 찾았다. ‘아.. 큰 책을 작게 복사해서 싸게 파는구나.’ 가격을 보니 복사판이 큰 책의 3분의 1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작은 복사본. ⓒ2017 Noh Sungil.
작은 복사본. ⓒ2017 Noh Sungil.


두 교과서를 사려고 계산하면서 직원에게 물었다.

"두 교과서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이 책은 교과서가 아니에요. 시험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한 일종의 암기용 노트예요."

평소 학교에서는 좋은 교과서로 수업을 듣지만, 시험을 준비하면서 무겁고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작고 싼 복사본을 선호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설명도 직원 분에게 들었다. 이미 공부한 내용이면 글자가 작고 다소 안보이더라도 큰 문제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오전 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봤던 한 무리의 학생들이 생각났다. 가이드 쏙 씨에게 정오에 웬 학생들인지 물었더니 학교 시설과 교사 수에 비해 학생 수가 많아 오전과 오후로 나눠 수업을 진행하는 캄보디아 교육 상황을 말해주었다.


정오 즈음 하교하는 오전반 학생들. ⓒ2017 Noh Sungil.


오전반 아이들 중에는 하교 후에 시내에서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버는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며칠 전 들렀던 노점에서 부모를 도와 음식을 만드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이런 작은 암기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일하는 중간 짬을 내 공부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린 나이부터 공부와 생계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그 아이들의 어깨에 지워진 무게를 잊지 말아야지.


다음 목적지를 위해 헤비 북패커의 가방을 싸면서 아이들의 미래가 담긴 작은 암기 노트를 혹시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방 깊숙이 넣었다.


캄보디아 책의 첫인상은 대실망이었다. 그러나 겉모습만으로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책의 질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원인이 캄보디아의 아픈 현대사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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