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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May 29. 2020

#12 A와 B 중에 고르라면, 난 C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베트남 문자의 역사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이 속한 동남아시아 내륙 여러 나라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고유한 문자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지난번 방문한 미썬 유적지에서 본 고대 참 문자를 더이상 쓰지 않는다.

문자 시스템은 사용자들이 있는한 없애려 해도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지금은 왜 쓰이지 않는 걸까?


베트남이 지금처럼 남북으로 길쭉한 영토를 가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베트남 지역에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복잡하게 공존했다. 여러 왕조가 각 지역을 차지하기도, 나누기도 하면서 오랜 세월 형성해온 긴 베트남 역사를 모두 다루기엔 지면이 너무나 부족하기에, 베트남에서 사용된 문자를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베트남 북부와 한자


베트남은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오랜 세월 자신들의 역사를 키워왔다. 현재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Hà Nội)가 있는 북베트남 지역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111년부터 기원후 938년 응오꾸옌(Ngô Quyền/ 吳權) 왕이 중국 왕조 남한(南漢)을 몰아내기까지(중국의 3차 지배) 북베트남 지역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 영향으로 북베트남에서 나타난 왕조와 그 상류층에서는 기록과 소통에 중국식 한자를 오랫동안 사용해왔다. 


1428년 레러이(黎利)가 중국 명나라군(중국의 4차 지배)을 완전히 몰아내고 국호를 대월(大越, Đại Việt)로 정한 후레 왕조(Nhà Hậu Lê/ 家後黎) 이후, 베트남어의 음과 문법을 올바르게 적을 수 있는 문자가 필요했다. 이때부터는 한자를 베트남어 음운에 맞게 고친 쯔놈(Chữ Nôm/ 字喃)이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쯔놈은 우리나라 신라 시대 쓰이던 이두, 향찰처럼 음독과 훈독이 모두 가능한 글자이며, 한자에 없는 베트남 고유어를 표기하기 위해 새로운 한자를 만들기도 했다. 이 쯔놈은 10세기경 최초로 등장한 이래 19세기까지 북베트남에서 베트남어를 적는 문자로 널리 쓰인다.



베트남 남부와 참 문자


중국 문화권에 속하는 북베트남과는 다르게 베트남 남부는 오랫동안 인도 문화권에 속했다. 계절풍을 타고 중국까지 항해했던 남인도 상인들에게는 계절풍이 바뀌는 동안 쉬어갈 수 있는 거점 항구가 필요했다. 긴 항해의 목적지인 중국에 들어가기 전, 인도 무역선들이 마지막으로 들러 정비하는 곳이 바로 지금의 베트남 중부 지역이었다. 그곳에 인도 문명 최동단으로 불리는 인드라 신의 도시 '인드라푸라(Indrapura)'가 있었다. 바로 그곳이 최근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찾는 베트남 도시 다낭이다.


인드라푸라를 수도로 기원후 192년에 시작된 참파 왕국(Chăm Pa)은 응우옌 왕조(Nhà Nguyễn/ 茹阮, 1802-1945)에 멸망 당하는 1832년까지 남베트남의 맹주로 자리를 지켰다. 이 참파 왕국에서 4세기 무렵 남인도 팔라바 그란타(Grantha) 문자의 갈래로 등장해 10세기경 가장 융성하게 쓰이던 문자가 참 문자이다. 참파 왕국이 자리했던 베트남 남부에서 오랫동안 쓰였다.


힌두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지도. 파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인드라푸라(지금의 다낭)이다.



10세기 말 중국에서 독립한 북베트남 여러 왕조는 11-18세기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남진(Nam tiến/ 南進) 정책을 펼친다. 독립국가로서 세력을 넓히고 싶었으나, 북쪽에는 중국, 서쪽에는 거대한 산맥과 밀림, 동쪽에는 바다가 있어서 뻗어 나갈 수 있는 곳은 남쪽 뿐이었다.

남쪽을 지키고 있던 참파 왕국은 점점 남쪽으로 밀리다가 결국 1471년 후레 왕조의 침공으로 속국이 된다.


북 베트남의 남진을 보여주는 연표. ⓒBetoseha


후레 왕조 이후 베트남 영토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최초의 통일 국가 응우옌 왕조가 등장한다(1802년). 응우옌 왕조도 초기에는 후레 왕조와 같이 속국으로서 참파 왕국의 자치를 인정했다. 그러다가 1820년 즉위한 민망 황제(Minh Mạng/ 明命)부터 상황이 변했다. 민망 황제는 기존에 각 지역별 자치를 인정하던 정책을 버리고 중국의 중앙집권체계와 유교를 받아들여 지방 여러 민족들과 마찰을 빚었다. 1832년 민망 황제는 결국 참파 왕국을 완전히 통합해 1600년을 이어오던 참파 왕국의 역사가 끝을 맺는다.


민망 황제 당시 중앙집권화에 맞춰 북부에서 사용되던 한자 기반의 문자 쯔놈이 공식 문자로서 베트남 전역에 보급된다. 참파 왕국이 사라진 뒤로도 참족 거주지를 중심으로 팔라바 문자를 기반해 발전한 참족 고유의 참 문자가 사용되었으나, 결국 중앙의 탄압을 받으면서 점점 사라져 간다.



프랑스와 꾸옥응으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 전국을 통일하고 입지를 다지던 시기, 베트남 외부에서는 신제국주의가 전세계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중국과 인도에 영향력을 미치던 영국을 의식해 프랑스는 동남아시아 내륙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애쓴다.

응우옌 왕조는 1802년 건국 당시 프랑스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건국 초기 서양 종교인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으나, 1820년 민망 황제가 즉위하고 쇄국정책과 유교를 장려하면서 기독교를 탄압한다. 프랑스에서는 기독교 박해를 구실로 동남아시아를 차지할 기회를 잡아 다낭과 사이공을 점령(1858년)하면서 인도차이나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프랑스 이전에도 베트남 지역에 선교사를 많이 보냈다. 16세기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베트남어를 배우기 위해 라틴 알파벳에 베트남어 성조를 표기해 적은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o de Rhodes, 1624-1644년 파송)가 1651년 로마에서 최초의 안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 《Dictionarium Annamiticum Lusitanum et Latinum》을 출간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 베트남에서 사용되는 문자 체계 꾸옥응으(Quốc Ngữ/ 國語)이다.


안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 《Dictionarium Annamiticum Lusitanum et Latinum》


프랑스는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해 1885년 베트남에 새로운 문자 체계 꾸옥응으를 보급한다. 식민지 초기에는 서양의 라틴 알파벳을 기반한 꾸옥응으가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문물로 인식되어 베트남 사람들에게 배척 받았다. 전통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쯔놈을 계속 사용하길 고집했는데, 쯔놈은 한자를 아는 지식인만 사용할 수 있었던 복잡한 문자였기에 대중적이지 못했다. 꾸옥응으가 보급된 지역에서 문맹률이 낮아지고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자,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자주 독립의 메시지가 오히려 오랑캐 문자라 불리던 꾸옥응으에 담겨 전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생겨난다.


셋 중 어떤 문자가 베트남 문자로 선택되었을까?


오랫동안 사용되며 진화한 베트남 북부의 쯔놈, 독창적으로 발전한 베트남 남부의 참 문자, 서양 세력이 효율적으로 만든 꾸옥응으 이 셋 중에서 어떤 것이 베트남 문자로 선택되었을까? 


참 문자는 참파 왕국이 응우옌 왕조에 멸망한 이후 가장 먼저 힘을 잃었다. 한자 기반 쯔놈과 라틴 알파벳 꾸옥응으는 근대 시기 60여 년의 공존기를 거치지만 1945년 9월 2일 호찌민(Hồ Chí Minh/ 胡志明)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越南民主共和國) 수립될 당시 공식 문자로 꾸옥응으를 채택하면서 비로소 오늘날 베트남 문자가 정리되었다.


어느 집단이든 구성이 바뀔 때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도구를 찾게 된다. 베트남처럼 남북으로, 또 문화적, 민족적으로 오랜 시간 나뉘었던 국가에서는 특히 그 도구가 중요했다. 문자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끼리 소통을 위해 맺은 약속이기에, 배우기 쉬워 이미 널리 쓰이고 있을 뿐 아니라 북도 남도 아닌 꾸옥응으는 좋은 대안이었다.


'간략한' 베트남 문자의 연대표. ⓒ2020 Noh Sungil.



문자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문자에 얽힌 간략한 베트남 역사를 알아보았다. 미썬 유적지를 둘러보며 최초로 품었던 '참 문자는 왜 지금 베트남에서 볼 수 없을까?'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지만, 이제는 그 아래에 존재하는 '문자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라는 질문을 더 고민하게 된다.


단순히 '오래 쓰인' 문자가 살아남는가? 인류 역사에서 사라진 수많은 문자는 차치하고, 오늘 알아본 쯔놈이나 참 문자처럼 한 지역에서 수백 년, 길게는 천 년이 넘도록 사용된 문자도 어느 순간 사용되지 않는다. 그럼 '정통성'이 있어야 살아남는가? 참 문자는 참족의 언어에 적합하게 고안된 정통성이 있었으나 결국 사라졌다.


나는 이 질문의 답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라는 문자의 본질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용하는 주체에 따라 '문자는 선택된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문자는 사용하는 주체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목적에 맞게 선택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되돌아가, 문자를 사용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베트남 역사를 되짚어 보자.


사용 주체가 왕이나 종교인, 귀족 등 특정 계층이었던 고대에 문자는 권위를 상징하는 도구로 쓰였다. 베트남 북부에서는 중국의 지배 아래 한자가 수입되었다. 왕의 흔들리지 않는 권세와 위엄이 한자로 적혀 선포되었다. 백성들은 어려워 읽지 못했으나 상관 없었다.

중국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난 독립 국가 시대에는 자신의 언어에 맞는 문자를 만들어내 '독립'을 선언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쯔놈이 그러했고, 참파 왕국이 멸망한 뒤에도 참족이 참 문자를 계속 사용한 것 역시 같은 이유라 할 수 있다.

근대를 지나며 문자 사용 주체가 더이상 특정 계층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 일방적인 문자 소통의 시대가 끝나고 상호 소통 시대가 온 것이다. 인쇄술이 들어오면서 문자를 쓰고 읽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프랑스를 통해 보급된 쉽고 효율적인 꾸옥응으 덕분에 시민들도 사회가 기록한 문화와 지식을 습득하여 삶의 선택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의 현대사는 전쟁으로 가득하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외국에서 들어온 문자가 이제는 민족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중국, 일본, 미국 등 세계 열강들과 싸워 이기는 저력을 보여준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한 목소리를 내는 데 문자의 역할이 중요했다. 꾸옥응으로 적힌 공산주의 선전문구가 거리 곳곳에 붙어 있는 풍경은 이런 현상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꾸옥응으가 쓰이는 오늘날 베트남 거리 풍경. ⓒ2017 Noh Sungil.



앞으로는 어떤 문자가 선택될까?


이제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와 집단을 넘어 개인과 개인의 연결이 중요하다. 현대의 개인은 일상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관계를 넘어 웹과 모바일 기기에서 만나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문자를 사용한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면서도 쉽고 빠르게 전하고 싶은 욕구가 어느 때보다 커진 모바일 시대와 그 이후에는 어떤 문자가 선택될까? 


아아... 아쉽지만 오늘은 질문만 던지고 이쯤에서 마무리해야할 것 같다. 긴 베트남 역사를 돌아보느라 너무 멀리 왔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바일 시대에 문자의 쓰임이 달라지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열 마디 말보다 이모지(Emoji) 하나가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보지 않는가?


이모지로 표현한 영화 제목 맞추기. 정답은 직접 찾아보시길...



이제 시선을 캄보디아로 옮겨, 다시 크메르 문자를 생각해본다. 베트남 만큼이나 굴곡진 근현대사를 겪어오면서도 캄보디아는 크메르 문자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오랜 식민지 시기와 내전 이후에도 소통 도구로서 크메르 문자는 유효하게 사람들의 선택을 계속 받았다는 것이다. 크메르 문자의 어떤 점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나아가 모바일 시대 이후까지 크메르 문자는 계속 선택될 수 있을까? 이제는 캄보디아의 근현대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볼 순서가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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