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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Jul 03. 2020

#17 잿더미를 지나 갈림길에 서다

새 시대를 맞이하는 크메르 키보드


특별한 수집품


오랫동안 크메르 문자를 추적하면서 특별히 수집하고 싶은 물건이 생겼다. 

바로 '크메르 타자기'. 


연말연시 휴가로 씨엠립에 들렀을 때 캄보디아인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폰트 디자이너 텝 소비쳇(Tep Sovichet)은 크메르 문자를 연구하기 시작할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이다. 마침 그도 가족들과 연말 휴가를 보내러 씨엠립에 와있었다. 오랜만에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크메르 타자기 얘기를 꺼냈다.


"소비쳇, 혹시 크메르 타자기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크메르 타자기는 저도 몇 년째 구하고 있는데 찾기가 어렵네요."


크메르 문자 덕질을 나보다 훨씬 오래 해온 그도 여태 구하지 못했다니, 어째서인지 궁금했다. 


"타자기는 예전에 관공서나 학교에서 굉장히 많이 쓰였어요. 아주 흔한 물건이었죠. 그런데 크메르루주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타자기가 전부 사라져 버렸어요. 모두 모아서 소각했다는 말이 있어요."

"저런.. 크메르루주는 사람과 기록물도 모자라, 기록하는 도구까지 없애버렸군요."

"네. 타자기는 수집하기엔 너무 희귀해져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어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그가 말했다.


"아. 씨엠립에서도 타자기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어요. 바로 이 근처예요."

"정말요?! 어디인가요?"

"'템플 커피'라는 카페에 두 개가 전시되어 있어요. 인테리어용으로요."



다음날 아침, 템플 커피에서 실물 크메르 타자기를 드디어 발견했다!


ⓒ2020. Nohsungil.
크메르 타자기. ⓒ2020. Nohsungil.



손목이 스치는 부분만 칠이 벗겨져 있었다. 누군가 열심히 메시지를 적었던 흔적이다. 캄보디아에도 몇 대 남아 있지 않은 귀한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지난밤 타자기 얘기를 나누며 소비쳇에게 다른 물건도 하나 더 물어봤다. 

"소비쳇, 크메르 '납 활자'는 남아 있나요?"

"아뇨. 전혀 남아 있지 않아요. 타자기는 그나마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납 활자는 정말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어요. 크메르루주가 활자를 녹여서 총알을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그럴 수가... 활자로 찍은 책은 예전에 프놈펜 도서관에서 본 기억이 나요."

"네. 그나마 납 활자로 찍은 책들이 몇 권 남아 있어서 과거 금속 폰트의 형태를 추측해볼 뿐이에요."


도서관에서 보았던 활자로 인쇄된 책. ⓒ2018. Nohsungil.



크메르루주는 지식을 어쩜 그렇게도 증오했을까? 민족의 문화와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넘어 그 기억을 기록한 책, 심지어 기록 도구까지 모조리 흔적을 없애버릴 정도로 말이다.

사람을 닮은 크메르 문자가 하루아침에 총알이 되어 생명을 빼앗는 도구가 되었다. 스러진 생명이 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사라진 기록도 돌아올 수 없다. 


크메르루주 이전 캄보디아인들의 문화와 기록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내전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자료들을 모으고 기억하기 위해 삶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울린다. 30년 동안 사스트라를 모아 온 코캔 씨가 그랬고, 죽음의 기억이 가득한 수용소에서 떠나지 못하는 부멩 씨가 그랬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록법


크메르루주 시대가 막을 내린 1979년 이후, 절체절명의 위기를 딛고 생존한 크메르 문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크메르루주가 물러난 이후에도 캄보디아에서는 한동안 내전이 계속되었다. 1991년 10월에 이르러서야 <캄보디아 분쟁의 포괄적인 정치 해결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a Comprehensive Political Settlement of the Cambodia Conflict)>으로 20여 년에 걸친 내전이 끝난다. 내전을 막 끝내고 캄보디아 정세가 조금씩 안정되던 1990년대, 전 세계에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가 대중화되었다. 그에 따라 캄보디아인들이 사용하는 컴퓨터에도 크메르 문자를 입력할 키보드가 필요했다. 초기에 가장 널리 쓰인 크메르 키보드 방식은 리몬(Limon)식이다. 


크메르 리몬 자판 ⓒ2010 www.pctips.com.kh


리몬은 컴퓨터의 보급만큼이나 대중적이었으나 입력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었다. 얼마나 복잡한지, 컴퓨터로 문서 작성을 하는 것보다 손으로 적는 것이 훨씬 빠르고 정확했을 정도라고 한다. 컴퓨터 키보드로 크메르 문자를 입력하는 어려움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키보드는 영어 알파벳에 최적화된 입력 장치이다. 컴퓨터 키보드는 과거 영어 알파벳 타자기에서 사용되던 쿼티(QWERTY) 방식을 기본으로 제작되었다. 쿼티는 1867년에 고안된 이래 전 세계에서 확고한 대중성을 차지하고 컴퓨터 입력장치에 기본으로 적용되기에 이른다.


영어 26자 알파벳에 최적화된 쿼티 키보드에 크메르 문자를 담기에는 크메르 문자의 수가 너무 많다. 크메르 문자는 자음만 33자, 모음과 독립 모음, 기호까지 더하면 개별 글자만 100자가 넘는다. 그 때문에 일반 키보드에서 숫자와 기능키를 제외한 30여 키만으로 모든 크메르 문자를 표기하려면 하나의 키로 3-4가지 글자를 나타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리몬 방식을 예로 들어, 아래 그림처럼 P에 해당하는 글자 네 자를 적으려면 각각 다른 키를 함께 입력해야 한다. 외우기도 어렵고, 여러 키를 섞어 쓰다 보니 시간도 많이 걸렸다.


리몬 방식에서 P에 해당하는 네 종류의 글자를 적는 방법. ⓒ2010 www.pctips.com.kh



이토록 복잡한 리몬 방식을 해결하기 위해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것이 바로 '유니코드(Unicode)' 방식이다. (유니코드는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컴퓨터에서 일관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된 산업 표준이다.) 


NiDA 팀의 유니코드 크메르 방식이 개발되면서 리몬 방식보다 입력 시간이 절반이나 절약되었다. 리몬과 유니코드는 한동안 공존하는 시기를 거치는데, 학교에서는 유니코드만 사용하도록 하는 정부 지침을 통해 유니코드 방식이 캄보디아에서 대중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지금도 봉제 업체 등 오래된 기계를 사용하는 곳에서는 리몬 방식을 사용하는 곳이 종종 있다.)


크메르 유니코드 자판.



하지만 여전히 한 키가 나타내야 하는 글자는 2-3자로 많기만 하다. 같은 분량을 문서 작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여전히 영어의 3배 정도 더 걸리는 편이다. 


프놈펜에서 20년을 살아온 통번역 전문가와 만났을 때 그가 문서 작업을 하며 느낀 어려움을 내게 토로했다. 


"A4 한 장을 기록하는데도 영어로 10분 걸릴 일을 30분 걸려서 하게 됩니다. 기록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에 따른 행정이나 지식을 전수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다른 언어에 비해 오래 걸립니다. 캄보디아 발전이 더딘 원인에 이런 기록 방식도 한몫한다고 봐요."



갈림길에 서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캄보디아 친구들의 행동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상대방과 소통할 때 문자 채팅보다는 목소리를 녹음해 무전기처럼 주고받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영어 또는 다른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과는 크메르어보다 다른 언어로 문자 채팅을 주고받는 친구들도 많았다. 


2007년 아이폰이 세상에 등장한 이후로 인류는 새로운 매체로 소통하고 있다. 무엇보다 실시간으로 빠른 소통이 필요한 모바일 시대에 캄보디아인들은 오히려 크메르 문자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언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문자가 있음에도,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입력 방식 때문에 사용성 측면에서 그 문자가 차선책으로 밀려난 것이다. (기본 크메르 자판이 안드로이드에는 있으나, 아이폰에는 아직까지도 없다.)


크메르인들의 정신이 담긴 소통 도구로 오랜 시간 사랑 받아온 크메르 문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렇게 사용성에서 밀려 서서히 사라질까? 아니면 획기적인 문자 개혁이나 새로운 방식이 등장해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될까? 오랜 식민지배와 크메르루주의 위기 속에도 생명력을 지켜온 크메르 문자는 지금 갈림길에 서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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