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없는 국립도서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Phnom Penh)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왓 프놈(Wat Phnom)을 둘러보고 내려와 목적지로 향했다. 오늘은 어떤 풍경을 만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길을 걸어 도착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캄보디아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u Cambodge). 3일에 한 도시, 서점은 반드시 들러보는 나만의 여행 원칙에서 도서관 방문은 빠질 수 없는 코스 중 하나이다.
프랑스식 이름이 알려주듯, 캄보디아 국립도서관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24년 세워져, 지금까지 거의 100년 동안 도서관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크메르루주 시기는 제외하고 말이다.
시내에서 왓 프놈으로, 도서관으로 이어진 도보 여행으로 온몸은 열이 많이 올라 있었다. 높고 시원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한숨 돌리고 둘러본 도서관은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다.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는 뻥 뚫린 열람실 양 옆으로는 보관 서가와 사무실이 붙어 있었다.
국립이라기엔 책이 너무 적은 것을 보고 마침 데스크에 있던 사서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여기 말고 다른 곳에도 열람실이 있나요? 다른 건물이라든지..."
"아뇨. 이 건물이 전부입니다. 보이는 열람실 이외에 옆에 보이는 작은 서가에 오래된 책들을 보관해둔 곳이 있어요."
캄보디아 국립도서관은 설립 초기 약 3천여 권으로 시작했는데, 그중 프랑스어 책이 대부분이었다. 세워진 지 1백 년이 지난 지금은 약 10만 권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에서 1년에 발간되는 종 수가 약 6만 권인 것을 생각하면, 매우 열악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상은 했지만, 크메르루주가 국립도서관에도 너무 큰 상처를 남겼다. 문화가 꽃 피던 프놈펜으로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 군이 들어왔다. 농민의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지식인을 학살한 크메르루주에게 지식이 쌓인 '도서관'은 사회악이었다. 군인들은 국립도서관에 있던 책들을 모조리 밖으로 꺼내 불태웠고, 비워진 공간은 크메르루주 군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생각하는 힘과 인간성을 말살하고 공포와 폭력으로 움직이는 사회를 만들었던 폴 포트 정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 축소판처럼 국립도서관에서 일어났다.
질문했던 도서관 사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친해졌다.
저는 독서를 정말 좋아해요. 제 친구가 제게 다른 직업을 구할 생각이 없는지 물었는데, 저는 책과 국립도서관이 좋다고 얘기했어요. 캄보디아 국립도서관도 다른 나라처럼 좋은 도서관이 되길 기대하며 일합니다.
사서 훈 보레이(Hun Borey) 씨는 얼마 전에 국제 도서관 사서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러 한국에도 다녀왔다며, 반가움을 표했다. 캄보디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미얀마 등 아시아 여러 나라 전문가들과 경험을 나누면서 많이 배웠다고 말해주었다.
매일 20-100명 정도의 도서관 방문객 중에는 과제 리서치를 위해 찾아오는 고등학생, 대학생이 많다고 했다. 나처럼 캄보디아 역사와 문화를 알고 싶은 외국인들도 종종 찾아온다고 했다.
보레이 씨에게 혹시 크메르루주 이전에 출간된 캄보디아 책을 볼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친절하게 보관 서가로 나를 안내했다.
크메르루주 때 프랑스어 책은 많이 살아남았어요.
군인들은 프랑스어를 읽을 수 없었거든요.
도서관에 보관된 크메르루주 이전 책들은 대부분 프랑스어 책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크메르루주 군인들은 크메르어 책은 대부분 불태우면서도 프랑스어 책은 읽을 수 없어서 남겨두었다고 한다. 덕분에 프랑스국립극동연구원(EFEO, 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에서 식민지 시절 연구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보레이 씨가 한쪽을 가리켰다. 컴퓨터와 스캐너, 타자기로 타이핑된 문서 더미가 쌓여 있었다. 크메르루주 이전에 발간된 크메르어 문서와 책이었다. 최근 도서관에서는 모든 자료를 스캔해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 했다. 종이가 오래되어 부식되거나 벌레 먹는 등 손상된 자료가 많아, 기술을 활용해 아카이브 데이터를 모으는 중이라 했다.
보레이 씨는 보관 서가 건너편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팜잎책 사스트라가 가득했다. 안쪽에서 한 사람이 데이터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코 사라온(Kov Saron) 씨로, 오랫동안 국립도서관에서 사스트라를 모아 데이터로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간단한 인사와 소개 이후에 사라온 씨는 검은 종이가 병풍처럼 접힌 두꺼운 책을 보여주었다.
그가 보여준 검은 책은 사스트라와 마찬가지로 캄보디아 전통 책의 한 종류인 끄리엥(Krieng)이었다. 중국의 종이 기술이 아직 소개되지 않은 10세기경부터 식물섬유와 동물 가죽을 혼합해 종이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이어 붙였고, 태국이나 미얀마에서도 볼 수 있는 동남아시아 전통 책이라는 설명을 사라온 씨가 덧붙였다.
사라온 씨와 인사를 나눈 후 도서관 테이블에 앉아 보레이 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꿈이 무언지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어요. 저는 아이들을 좋아해요. 캄보디아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좋아하고요. 우리가 상상하고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그림책으로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길 꿈꿔요."
비록 규모는 작을지 모르지만, 크메르루주가 폭력으로 채웠던 도서관에 다시 책이 채워지고 매일 그곳을 찾는 학생들, 캄보디아를 알고자 하는 외국인들, 그리고 보레이 씨를 통해 그곳에는 생명이 넘친다.
사진을 다시 보니, 보레이 씨는 그의 꿈처럼 다양한 상상력이 열매 맺힌 책나무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