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성일 Jun 19. 2020

#15 어눌한 여행 가이드

메시지는 무엇으로 전해지는가?


앙코르 투어를 앞두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씨엠립의 첫날 아침으로 돌아간다. 호텔 로비에서 유창한 한국말로 다가온 가이드 쏙(Sok, 가명) 씨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난 그때부터 3일 동안의 앙코르 투어를 마치고 헤어질 때까지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40대 초반인 쏙 씨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고, 가족과 씨엠립 외곽에 살고 있다. 그가 한국어를 배운 이유가 궁금해졌다.

“한국어는 어떻게 배우셨어요? 한국에서 사셨어요?”

“한국에 가본 적 없습니다. 캄보디아에서 한국어 배웠어요. 학원에서.”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쏙 씨는 씨엠립에 살면서 어릴 적부터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앙코르 유적을 소개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세계여행이 본격화되고 앙코르 유적 복원이 하나 둘 완료되면서 앙코르 와트를 찾는 관광객들로 붐비기 시작한 것이 쏙 씨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20대 중반에는 캄보디아 정부에서 인정한 공인 가이드가 되어 꾸준히 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간 마련한 기반에서 결혼도 하고 아들도 한 명 생겼다.


성수기에는 한 달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할 때도 많았다. 외국인 가이드 비용이 캄보디아 평균 임금보다 나은 수준이라, 몸은 많이 힘들었지만 성수기 몇 달간 열심히 일하면 한 가족이 한 해를 든든히 생활할 수 있었다.



가이드 유니폼에 붙은 마크. 왼팔에는 투어가이드 표시, 오른팔에는 압사라가 그려져 있다. ⓒ2020. Nohsungil


그렇게 영어 가이드 10년을 채워갈 무렵,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가 다가왔다. 그즈음에는 급격히 늘어난 영어 가이드 때문에 일을 얻기가 예전만큼 쉽지 않았다. 점점 일하는 날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쏙 씨는 주변 몇몇 가이드 친구와 함께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영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를 배우자.'


“언제부턴가 투어 할 때 아시아인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일본, 한국, 중국 관광객 많이 왔어요. 처음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한 친구가 한국어 배우자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1년 정도 영어 가이드 일과 병행하며 쉬는 날이나 비수기에 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을 무렵 영어와 한국어 가이드를 병행하다가 이제는 한국인만을 가이드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정해진 레퍼토리로 동선을 짜서 움직이기 편한 단체 가이드를 많이 했지만, 여러 사람을 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투리를 쓰는 한국인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정말 난감했다.

초반의 힘든 시기를 지나 지금은 소그룹이나 개인 가이드를 주로 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단체보다 감정 노동이 적고, 같은 노력에 비해 단가도 더 높기 때문이었다.


쏙 씨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게 된 사연은 여기서 끝났다.




투어 중간중간 쏙 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특이한 부분을 발견했다. 질문을 던지면 엉뚱한 답변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투어 내내 유적의 정보를 술술 읊던 그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믿고 명쾌한 답변을 기대하며 궁금한 부분을 차근차근 몇 번 더 되물었으나 이내 말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의사소통의 한계를 깨달은 것이었다.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배운 언어여서인가?' 사실 조금 실망스러웠다. 책에서도 못 본 현지인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고, 꿈에 그리던 유적지를 깊이 알게 된다는 환상을 채우고 싶은 맘도 컸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질문을 많이 하지 않게 되었다. 일상 소통은 가능하지만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정도, 딱 그 정도의 거리, 그 정도의 언어로만.


3일 동안의 투어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찾아왔다. 마지막 인사로 마주 잡은 손을 꼭 쥐고 쏙 씨의 친절한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반짝이는 눈과 환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돌아서는 그를 보며 마음 한 구석에서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의 한국어가 어눌해서 우리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것은 나였다. 내가 미리 그어 놓은 선을 결국 마지막까지 넘지 못했다. 언어로 채워지지 않았던 거리가 그의 눈빛으로, 배려하는 행동으로 나도 모르게 조금씩 채워졌음을 작별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알았다. (다음 편에 계속)



ⓒ2017. Nohsungil


매거진의 이전글 #14 푸르고 아름다운 학살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