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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Mar 05. 202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세월호 사건이 있고 나서 나는 한동안 우리 아이가 죽거나 내가 죽는 상상에 괴로웠다. 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져 그 속에 아이가 있고 나는 손으로 그 잔해를 파헤쳐 아이를 찾으려고 한다든지 내가 죽고 나서 아이의 엄마 잃은 슬픔을 생각했다. 나도 어찌할 수 없이 계속되는 공상을 멈추기 어려웠고 그런 상상을 하면 눈물이 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내가 없이 남편 혼자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우리 엄마가 또는 우리 언니들이 우리 아이를 맡아주려나 싶기도 하고, 이웃들이 우리 집에 반찬이라도 챙겨서 주려나 싶기도. 참으로 황당한 상상들을 한동안 했었다.


이런 나를 고백하니 친구가 추천한 책,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 책을 읽어봤지만 결국 신의 가호아래 사랑으로 그 아이는 살아간다라는 결론이 나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고 감흥도 별로 없었다.


그 후에 언제 그게 지나갔나 싶은지도 모르게 서서히 그런 생각들의 방문은 뜸해졌고 일상을 잘 살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두 아이를 키우는 나는 아주 가끔이지만 여전히 나의 부재나 아이의 부재를 상상한다. 한 번도 이런 불행을 상상해 본 적 없다는 어떤 누군가에게는 나의 이런 모습은 병이겠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아예 안 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딱히 대안도 없고, 생각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런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막기 힘들다.


며칠 전 만 8세가 된 둘째 생일 언저리에서 어떤 소설을 읽다가 10살이 안된 아이에게 부모의 기억은 희미하다는 구절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만 8살인 둘째, 엄마 냄새를 너무 좋아하고 등교 때마다 하트를 쏴주는 둘째에게 하루아침에 내가 사라진다면 과연 아이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갈까. 동영상이 많아서 그걸 자주 보면서 나를, 내 목소리를 잊지 않으려고 할까 아니면 너무 아파서 아예 보지를 못할까. 예전에 비해 영상이나 사진의 기록들이 기억을 더 선명하게 연장시켜 주긴 하겠지만 나의 8살 즈음의 기억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일화가 한두 개이며, 그 당신의 엄마나 아빠에 대한 기억이나 이미지는 거의 없다.


세월호 이후 불행한 상상에 휩싸일 무렵 나는 신에게 협박했다. ‘저는 데려가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제가 엄마가 아니면 몰라도 이제 엄마가 된 이상 저는 애 클 때까지 무조건 건강하고 사고도 나면 안 돼요. 저는 엄마니까요. 아시죠? 저는 아닙니다. 절대 안 돼요!’ 나는 아이가 클 때까지 절대 죽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것은 둘째가 8살인 지금도 유효하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 책을 읽었다. 대학을 다니는 다 큰 아들을 교통사고를 잃고 작가는 식음을 전폐하고 피폐하게 지내며 신에게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요양을 하게 된다. 거기서 산책을 하다 얻은 깨달음. 왜 너의 아들만 안 되는 거냐고. 하루에도 억울하고 아까운 죽음이 얼마나 많은데 왜 너만 안 되는 거냐고. 그동안 나에게만 해당이 안 됐을 뿐 죽음은 항상 일어났고 그 고통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절대 나에게만 별개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이 나에게 닥쳤을 때 왜 나냐고 부르짖기에는 신의 편애를 떼쓰는 것 밖에 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역으로 내가 뭐라고 왜 나만 피해 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결국은 신의 가호를 구하며, 엄마의 사랑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사랑으로 잘 자랄 것이라는 믿기 힘들지만 믿어야 만하는 결론을 붙들고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 나도 엄마만큼의 사랑은 아닐지언정 누군가에게 나의 따뜻한 말투, 눈빛, 태도로 대해야겠다. 누군가에게 베풀어질 신의 가호에 나를 사용하시기를. 누군가의 엄마를 잃은 아픔에 한 스푼의 위로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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