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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Feb 27. 2023

80일간의 세계일주 -Taxi로

에세이

"그린치과까지 가주세요. 시계탑의"    

출근은 보통 도보로 하는데 어제 아침에는 시간이 급해져 택시를 세웠다. 뒷좌석 문을 여니 감색 제복을 매끈하게 다려 입은 중년의  운전기사가 의외로 밝게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적잖이 더우시죠!"

머리카락을 흘핏보니 숱이 옅어지고 염색한 흔적이 엿보인다. 나이는 60대 후반으로 짐작되었다. 흰색 중형 소나타 택시로 구형이었으나 시트며 바닥이며 구석구석 깔끔하게 청소되어있다. 나도 이내 편안해졌다.


그것도 잠시 차에 올라 얼마가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차 안에 방향제를 어찌나 뿜어 놓았는지 숨쉬기가 거북했다.

"흠 흠.... 차에서 상큼한 향기가 풍겨나네요?"

"예, 차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는데도 하도 주행을 많이 해서 그런지 냄새가 나는 듯하여 향수를 뿌렸습니다. 라벤더라던데. 향이 상큼하고 좋으시지요?"

운전기사는 방향제가 그리도 자랑스러운지 아니면 오랜만에 손님을 태워서인지 아무튼 연신 싱글 벙글이다.


"네, 당연히 좋지요. 하지만 내게는 좀 강한 편이네요. 기관지가 약해서요." 사실 그런 인공적인 향은 좋아하지 않지만 기사의 자랑스러운 향기 자랑에 면박을 주기 싫어 둘러 대었다.

이미 출근시간대가 지나 도로에는 교행하는 차량이 뜸했다. 막힘없이 달리는 중에도 점점 더 가슴이 답답해져 양해를 구하고 창문을 열어 바깥공기를 모셔왔다.


"몇년이나 이차로 영업을 하셨나요?"

"5년이나 몰았는데도 겨우 62만 km 밖에 주행하지 않았어요. 이제 곧 폐차를 해야 해요. 앞으로 이삼년 더 몰아야 본전을 뽑는데..." 기사는 새로 사야 할 차의 할부금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싱글거리던 미소가 사라지고 다소 풀이 죽은 모습이 되었다.

"'겨우 62만 km 밖에 달리지 않았다'구요? 겨우라니요! 그게 얼마나 긴 거리인데요."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을 이어갔다.

"이 차로 그만큼 달렸다면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는 줄 아세요? 자그마치 열다섯 번 하고도 반바퀴를  돈 거예요. 5년 동안에..."

80일간의 세계일주

"열다섯 바퀴를 돌아요? ... 에이 그럴 리가!"

기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고 되물었다.

"그럼. 음... 내가.. 그러니까.. 일년에 지구를 세 바퀴도 더 돈다는 말씀이세요?"

"네에 그렇네요. 기사님께서 무리해서 하루에 500km를 주행한다면.. 에에.. 지구 둘레가 정확히 4만 km이니 80일에 한 바퀴 도는 겁니다. 세 달이 못 걸리네요."

그러고 보니 영업용 택시의 80일간의 세계일주인 셈이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요... 기사님은 그동안 빛이 2초간 이동한 거리보다도 멀리 여행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빠른 빛이 2초간 지나간 길이보다 '더'라는 말입니다. 대단하지 않으세요?"

만약 그가  5년 동안 무사고로 운전을 하였다면 정말 경이로운 일을 하신 것이다.


"에에? 지구 둘레가 그렇게 밖에 안 됩니까? 선생님! 과학 선생이신가 몰라도 잘 아시네요. 근데 이 큰 땅떵어리를 어떻게 잰대요? 바다가 있어서 줄자로 잴 수도 없을 테고... 그리고 조금도 에누리 없이 딱 4만 킬로가 될수 있나요? 나 참."

택시 기사는 아직도 자기가 운전한 거리가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이런 대화가 싫지는 않은 듯했다.



"뭐 지금은 GPS나 다른 장비로 아주 정밀하게 재겠지만..."

나는 좀 뜸을 들였다.

"지구를 최초로 잰 기록은 BC234년이에요. 예수님이 태어나기 200여 년 전에... 혹시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짐작하겠어요? 기사 양반."      

그 시대에 지구 둘레를 잴 생각을 하였다니 실로 감탄할 만한 일이지 않는가?

말이 사뭇 재밌어진다.

"미국은 아닐 테고요..."

이제 기사도 약간은 여유를 되찾은 듯 농담을 곁들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스나 로마 사람이 아닐까요?"

"그렇죠. 내 생각에도 당시에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이 가장 똑똑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도형이나 기하학은 이집트가 가장 발달했대요."


이집트인의 지구 둘레 구하기

그리고는 '나일강 상류로 부터 흘러온 강물이 매년 반복되는 범람으로 인해 경작지의 측량술이 발전하여 결과적으로 이집트의 기하학이...'라고 말하려다가 점점 더 복잡해질까 봐 뱉어 내지는 않았다.


"와아, 현재는 후진국인데 옛날에는 대단했었나 봐요, 이집트가. 그나저나 뭐 특별한 기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알아냈대요?"

택시는 이윽고 사직동 사거리를 지나 체육관 앞의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네에, 이제 거의 다 왔군요. 집에 혹시 자제분이 계시면 함 물어보세요. 중학생들이라면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시계탑 5 거리 신호등에 멈춰 섰기에 더이상 말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택시 요금을 신용카드로 계산하면서 다시 한마디 거들었다.

"지구 둘레가 정확히 4만 km인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자고 정했기 때문이에요."



 P.S.

과거에 적도를 지나는 지구 둘레를 4천만으로 나눈 값을 1m로 확정했으므로 그리 되었지만 요즘은 측청 환경과 기술이 변하여 40,150Km 정도로 본다 한다.

택시기사에는 못 미치지만 우리도 매일 출퇴근에 50km씩만 달리면 800일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거리를 겨우 2년 2개월에 가는 셈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 실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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