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덕소덕 : 소심한 덕후들의 소소한 덕질 라이프 16화
팟캐스트 16화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화에 이어 이번에도 '정세랑 특집'으로 진행합니다. 저는 정세랑 작가님의 소설 중 하나인 <시선으로부터,>를 골라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 책, <시선으로부터,>는 나름 최신작입니다. 2020년에 출간된 장편 소설이거든요. 출간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소설이기도 하죠. 정세랑 작가님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도 제작된 <보건교사 안은영>으로도 유명하시죠. 저는 정세랑 작가님께서 쓰신 이야기 중 어떤 것을 나누어볼까 고민하다가, 조금 특이한 이야기를 다룬 것 같은 <시선으로부터,>를 골라보았습니다.
이 책은 다름 아닌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할머니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일종의 가족들의 프로젝트를 담았습니다. 이름은 제사라고 명명했지만,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일반적인 제사는 아닙니다. 살아 생전 자식들에게 절대 자신의 제사는 지내지말라 강조했던 이였기에, 그의 딸은 조금 재치있는 생각을 해내어 10주기를 기념해 살아 생전 자신의 어머니에게 의미 있던 장소 중 한 곳인 하와이를 선택해 그곳에서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의 특별함을 담은 것들을 가져와서 기념하기로 한 겁니다. 이 책은 그를 위해 가족 구성원들이 하와이에서 각기 다른 경험을 하고, 각기 다른 의미 있는 특별함을 담은 것들을 가져오는 그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거 '심시선'과의 추억을 풀어내고, 또한 그 '시선'과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마주하는 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입니다.
이제 눈치 채셨겠지요? 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시선으로부터,>입니다.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그 각기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여러 이야기를 시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와이에서 마주하는 여러 사건들로 풀어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당시에 흔하지 않았던, 아니 지금조차도 비범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선의 삶으로부터 뻗어 나온 그의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는, 다른 삶을 살아갔던 시선을 어느 면에서는 닮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시선의 다름이 각각의 인물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지를 생각해보게 만들죠. 그런 일련의 과정은 시선의 아들, 딸들 뿐만 아니라 손녀들에게도 이어집니다.
심시선을 기억하며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이 가져온 저마다의 물건과, 그 구성원과의 심시선의 관계를 풀어내는 과정이 꽤나 재밌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그중 시선의 유일한 아들인 명준, 그리고 며느리 난정 사이에서 태어난 이우윤이라는 캐릭터의 이야기가 재밌었습니다. 우윤은 미국에서 유학하며 기존 공부하던 조소를 그만두고 할리우드에서 괴물을 만드는 크리쳐 디자이너가 됩니다. 꽤 특이한 직업을 가졌죠.
사실 우윤은 어렸을 때 큰 병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시절 꽤나 오랫동안 입원 생활을 했던 걸로 그려지죠. 그런 우윤은 할머니의 제사로 올릴 것을 생각하다, 서핑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하와이의 서핑 강사 앤디에게 서핑을 배우죠. 운동신경이나 체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우윤이 서핑을 배우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물에 빠지고, 넘어지고, 심지어는 다치기도 합니다.
우윤은 왜 서핑을 선택했을까요? 저는 우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윤이 파도를 타기로 결정했던 것은 아마도 끊임없이 자신과 가족을 따라다니는 어린날의 그 아팠던 기억 탓일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우윤을, 그리고 그의 가족을 괴롭히는 기억이죠. 과거 겪었던 그 아픔의 기억들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윤은 바다에서 파도를 타는 것으로 자신의 아픔의 기억들을 정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직도 그 무렵의 기억에 지배당하고 있는 건 엄마 아빠였다. 우윤이 아팠던 것 때문에 엄마 아빠는 세상이 우윤을 해치기 위해 존재한다고 잘못된 믿음에 빠져버렸다. 피구를 하다가 공에 맞아 얼굴이 좀 부었을 뿐인데 공 던진 아이의 부모에게 전화를 했고, 독감이 심하게 돌면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고, 자전거나 스케이트보드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반려동물이든 야생동물이든 동물은 웬만해서는 다가오지 못하게 했으며, 대다수의 식물을 옻 취급했고, 가까운 곳이면 먼 곳이든 여행 가는 것도 탐탁지 않아했다. 우윤이 자취를 시작했을 땐 대형 소화기를 사오고 비상 완강기를 꺼내 길이를 재보았으며, 최근엔 직장에서 야근을 너무 자주 시킨다며 따지려는 걸 겨우 말렸다. 우윤에게만 그랬다. 막상 자신들이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는 물리치료도 받기 귀찮아했다. ... 부모를 설득하다 우윤은 아득해졌다. 원래 불안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후천적인 불안이었고, 우윤이 원인이었다. 죄책감과 배신감이 함께 들었다. 어쩜 이렇게 속상하게 한담? 우윤이 아팠던 건 우윤 탓이 아니었는데, 이제 와 우윤이 노력해도 우윤의 부모는 변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식만 부모 속을 썩이는 건 아니었고 반대도 가능했다.
이처럼 아팠던 기억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가족을 옥죄는 것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윤은 어린 시절 자신이 아팠던 그 기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부모님과 자기 스스로를 위해 서핑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일년 내내 아픈 아이들을 위해 성금을 보내는 엄마, 그런 행위로도 그 불안감에서 자유해지지 못했던 부모님을 생각하며 우윤은 자신의 방에 걸린 '리브 어 리틀 Live a litte'이라고 적힌 포스터를 떠올립니다.
'리브 어 리틀'이라고 멋들어진 필기체로 적힌 포스터를 붙였다. 글씨 아래로 커다란 파도와 점처럼 작게 서핑하는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고, 우윤은 더이상 아이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늘 아픈 아이가 있었으므로 서핑을 해봐야겠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리브 어 리틀. 난 좀 살아볼 거야.
실패를 거듭한 이후에 우윤은 결국 파도를 타는 데 성공합니다. 평소보다 더 높은 파도였는데도요. 그리고 부스러지는 파도에 슬쩍 실리콘 물병을 가져다대고 파도를 물병에 담아 내죠. 할머니의 제사를 위해서요.
보드는 계속 나아갔고 우윤은 그 위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쾌감을 느꼈다. 달리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미끄러지는 것과도 달랐다. 보드 밑에 느껴지는 힘은 우윤이 만나보지 못한 거대한 동물의 일부 같았다. 바다의 힘. 지구의 힘. 모험과 죽음의 힘. 우윤은 계속 계속 나아갔다. 환호하며, 웃으며, 자부심을 느끼며. ... 보드 위에 앉아 떠 있기만 해도 좋았다. 우윤과 똑같이 물에 흠뻑 젖은 죽음이, 어린 시절 그렇게 두려워했던 대상이 투명한 팔을 우윤의 어깨에 잠시 두르고 기이한 격려를 해주었다. "큰 파도 체질이네. 그런 사람들이 있지."
서퍼들이 사용하는 은어 중 'Cowabunga'라는 말이 있습니다. 파도를 잘 탔을 때 내뱉는 일종의 감탄사로 쓰이죠. 우윤은 자기 자신을 옥죄던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아픔에 대한 기억을 파도를 넘어, 비로소 눈앞의 파도에 몸을 맡겨 오르게 되고, 그 파도를 넘게 된 것이 아닐까요? 눈앞의 높은 파도를 넘는다는 것, 그를 통해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 하던 대상이 오히려 자신에게 격려를 해주는 것 같은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 거죠. 저는 우윤의 이 장면에서 그 감탄사가 생각났습니다. 인생에서 나를 옥죄는 기억들을 넘어서는 것, 비로소 자유해지는 것, 그것을 지나가는 파도로 삼아 그 위를 자유롭게 서핑해내는 것. 그것 자체가 우리 인생에 "Cowabunga!"라고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는 순간이 되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 책의 제목 <시선으로부터,>의 '시선'의 의미가 세 가지 정도로 읽혔습니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이야기의 시작인 '심시선'이라는 인물에서 시작된, 시선으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된 심시선의 가족들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던 삶을 살았던 심시선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명한 예술가를 따라 무작정 독일로 향해 함께하며 미술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수많은 역경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온 심시선. 그리고 세 번의 결혼 생활과 여러 집필 활동, 방송 활동 등을 하며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던 심시선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했습니다. 그런 세상의 여러 잣대와 시선에도 불구하고 심시선은 자신만의 그 독특한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죠.
저는 그리고 또다른 의미로 심시선을 떠올리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 당면한 문제와 고민들을 바라보고 있는 등장 인물들의 시선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우윤이라는 인물 말고도 이 책에는 시선으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된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책의 앞 부분에는 인물 관계도까지 나오죠.) 우윤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스스로의 문제를 딛고 일어섰던 것처럼, 다른 여러 인물들의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세 가지 시선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독자들은 이 책의 다양한 '시선'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고민을, 우리의 삶을 환기시킬 수 있게 되는 거죠. 저는 그래서 이 책의 이 유머러스하고도 따뜻한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특별히 정세랑 작가님은 이 책을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할머니가 가지지 못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자 했다고 덧붙이기도 했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이 시선을 기념해 제사로 특별한 추억과 기억이 담긴 것들을 모았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