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의 대비는 죽음과 삶의 차이처럼 극명했다.
입원한 아버지를 뵈러 병원에 갈 때면 다리를 건너야 했다. 먼발치에서 장례식장이 보인다. 검은 옷을 입은 상주와 가족들이 드나든다. 조금 더 걸어가면 병원 본관에 도착한다. 흰색 가운의 의사들이 분주하다. 그들은 파수꾼이다. 환자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돌보고 치유하는 소명을 받은 이들이다. 그들은 직장인이다. 병원의 매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회사원이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목표가 주어졌을 때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개인에게 달려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라는 동안 나이 들고 병들어 갔다.
말년에 담도암 판정을 받으셨다. 고향에 있는 국립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완치에 대한 장담을 할 수가 없단다. 환자가 원하면 수술해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서울의 유명한 종합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A병원과 B병원의 전문의를 알아보고 진료 예약을 잡았다. 그나마 적극적이었던 A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의사는 희망 섞인 진단을 내렸다. 황달 수치가 내려가면 수술할 수 있단다. 입원 첫 날부터 CT촬영과 각종 검사가 시작되었다. 수 없이 반복했다. 수술 부위가 간단치 않아 영상 촬영이 필수라고 했다. 완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아버지는 무기력하게 또 기약없이 입원해 있는걸 싫어하셨다. 완치에 대한 희망에 사로잡혔던 나의 잘못으로 병원에 잡혀 계셨다. 아버지는 희망고문이란걸 이미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수많은 검사는 의사 개인에게 할당된 매출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나의 잘못이다.
대부분의 의사는 환자의 치유를 위해 헌신한다.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다. 담당과의 전문의를 알아보고 진료 예약을 할 때 더 신중하게 선택하지 못했다. 보호자의 눈빛을 피하는 의사를 의심 했어야 한다. 수술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온갖 검사를 했다. 고가의 CT 촬영은 계속되었다. 눈빛을 맞추지 못했던 이유는 자기 양심의 부르짖음을 무시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수술 날짜가 확정되었지만, 예정일 하루 전에 연기 되었다. 긴급 간 이식 환자가 있단다. 담도암은 간 이식보다 후순위였다. 암 세포가 다른 기관으로 전이될까 전전긍긍하던 우리는 그렇게 후순위가 되었다. 황달 수치를 낮추어서 다시 입원하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왔다. 기다리는 시간은 숨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