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니 Feb 15. 2021

청소기 속 먼지는 잘만 모이던데

다시 모을 수 있을까

모을 만하면 털어서 여행 가고, 모을 만하면 쓸 일이 생겼던 나의 돈. 그러다가 30대가 되었고 이젠 정말 모아야 되겠다 싶어서 저축하기 시작했다. 주거래은행에서 추가 금리를 주는 이벤트를 하면 긴 접속 대기시간을 뚫고 적금을 들었다. 금리가 높은 적금은 대게 한도 금액이 정해져 있어서 적금통장을 3개를 만들었다. 그 와중에 10만 원씩 청약도 넣었다. 매달 남는 돈으로 해외 주식 소수점 투자도 시작했다.


이제 막 돈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다 끌어모아 전세 보증금에 보탰다. 나의 사랑스러운 해외주식들을 몽땅 팔아야 했다. 300만 원 조금 넘는 돈으로 수수료 등을 빼고 30만 원쯤 벌었으니 괜찮은 투자수익이었지만 정말 팔고 싶지 않았다. 만기까지 모으면 이자가 10만 원 넘게 나오는 적금은 예금담보대출을 고민하다가 혹시 다른 대출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해서 깨버렸다. 가입만 해놓고 입금은 하지 않았던 청약저축도 이제 막 다시 시작했는데 그 몇 푼도 아쉬워서 깼다. 독립, 괜히 하는 건 아닐까 집을 계약하고 나서 후회도 많이 했다.




전세보증금 입금 후 내가 모았던 그만큼의 돈을 빨리 다시 모으고 싶었다. 눈물로 팔았던 해외주식도 다시 사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나에게 전세대출을 해준 은행에 약속했던 대로 청약통장을 만들었다. 지난번처럼 비정기적으로 넣기 싫어서 10만 원씩 자동이체를 걸어두었다. 매달 나갈 가전과 가구 할부, 관리비와 수도요금,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이 얼마나 나갈지 몰라서 첫 달에는 청약저축으로 만족했다.


11월 중순부터 살기 시작해서 12월에는 공과금들이 예상보다도 훨씬 적게 나왔다. '중순부터 살았는데 이 정도라면 다음 달에는 2배로 나온다고 생각하면 되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12월 말에 10만 원짜리 적금을 하나 더 만들었다.


착각이었다. 12월보다 1월 도시가스요금이 3배가 더 많이 나왔다. 약간 춥게 지내는 것에 익숙해서 보일러를 많이 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유독 혹독했던 이번 겨울 날씨에 생각보다 많이 나온 것이었다. 예상보다 2만 원 더 나왔지만 그래,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1월의 어느 추운 날, 출근하려고 차에 시동을 걸었는데 차가 이상했다. 꿀렁꿀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예열을 위해 잠시 시동을 켜 두었다. 하지만 꿀렁이는 느낌은 계속되었고 출발하자마자 엔진 경고등이 들어왔다. 회사에 조금 늦는다고 통보하고 그 길로 가장 가까운 서비스센터로 갔다. 점화플러그 네 개와 무슨 소모품 하나가 나갔다고 했다. 수리비가 25만 원 나왔다. 3개월 할부로 결제했다. 공과금 2만 원에 자동차 수리비 할부 8만 원. 예상치 못하게 10만 원이 나갔고 새로 들었던 10만 원짜리 적금을 깼다.


보증금을 위해 받았던 신용대출은 최대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2년 계약 만료 전에 다 갚고 이 집을 나갈 때 그 돈은 내 돈이 되어있길 바랐다. 그런데 최근에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 전, 코로나 덕분에 저축 금액이 확 올라갔던 것을 생각하니 못되게도 코로나가 조금 더 지속됐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거의 없을 테고, 옷을 사 입을 일도 없고, 여행도 못 가니깐 이런 생활이 길어져야 돈이 모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한 가지 큰돈이 나갈 일이 남아있었다. 바로 에어컨 구입.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에어컨은 필수라고 했다. 회사 아주머니 한 분은 본인에게 냉장고 다음으로 꼭 있어야 할 가전은 에어컨이라고 하셨다. 베란다를 통해 담배냄새가 들어와서 마음 놓고 창을 열어놓고 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에어컨을 사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 집은 구조상 쾌적하게 생활하려면 적어도 두 개의 벽걸이 에어컨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계산해도 100만 원은 써야 할 것 같았다. 당근 마켓에서 괜찮은 매물 몇 개를 발견했지만 이전 설치비를 생각하면 새 것을 사나 마찬가지 일 것 같았다. 차라리 할부가 되는 전자매장에서 무이자 할부가 가능한 만큼 결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내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모양이다. 최근 에어컨을 살 수 있는 정도의 금액으로 화상영어 1년 수강권을 질렀다. 4개월 분할 납부로. 30분 무료 시간을 얻어서 수업을 받아봤는데 20년 간 영어공부를 해온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내 모습에 고민하다가 결제해버렸다. 에어컨을 살 수 있을까? 만약 사게 된다면 생활비를 최대한 아껴야 할 것 같다. 할부가 끝날 때까지 저축은 상상도 못 하겠지.




MBC 무한도전 _ 박명수 어록

'티끌 모아봤자 티끌'이라는 박명수의 명언에 예전에는 크게 공감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매일 청소기를 돌려보면 안다. 매일 돌려도 티끌(티와 먼지를 통틀어 이르는 말)은 머리카락과 함께 매일 쌓이고 3일쯤 되면 뭉치가 되어 먼지함을 비워내야 한다. 내 돈이 이 정도로만 쌓이면 걱정 없을 것 같다. 독립이 잘한 선택이 맞는지 통장이 나에게 묻는다. 독립 전에 비해 턱 없이 적어진 저축액을 보면 미래가 불안해진다. 이제 끝날만 하면 큰 지출이 또 생긴다. 어쩌면 내 돈은 티끌이 아니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인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매일 냉장고를 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