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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Apr 26. 2024

끌어당김의 법칙

나와 나의 이야기



그곳에 가고 싶었었다. 하루에 2번 길이 열리는 곳. 하루종일 길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는 곳. 그래서 미리 날을 맞춰서 가야 하는 곳.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 에 나오는 사막여우가 한 말처럼, 이 세상 수많은 장소 중 하나일 뿐인데. 어째서 그곳은 내가 길들여서 관계를 맺고 싶은 곳이 됐을까. 2009년의 나는, 그곳에 가서 어떤 시간에 공들였을까.


2024년의 나는, 다시금 소매물도에 가는 아침 첫 배를 탔다.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봄이 인사를 건네왔다. 꽃샘추위가 변덕을 부린 사이, 동백꽃은 활짝 핀 채로 어느새 땅에 떨어져 있었다. 바다를 옆으로 끼고 우리는 둘레길을 천천히 걸었다. 오솔길을 따라 숲 속 가득 채운 나무들 사이로.



일상에 지쳐 굳어진 내 마음이 다시 말랑해졌다



그 옆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와, 연이은 파란 하늘은 한 장의 커다란 도화지 같았다. 비어 있지만 가득 차 있었다. 그 도화지를 가득 채운 건, 저 멀리서 부서지는 파도, 새들의 지저귐, 향긋한 봄바람, 수면 위로 반짝이는 햇살.


가득 찬 경이로움 속에서
고요의 여백이 있었다.


나의 딸은 푸른 바다의 물결소리를 들었고, 나무의 결을 느꼈고, 땅에 떨어진 잎과 꽃잎을 알아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자연 속에서 움직임이 하나하나 자연스러웠다. 배고플 때 밥을 먹듯이, 피곤할 때 잠을 자듯이. 우리가 오늘 여기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바다를 바라보는 눈길이, 나뭇결에 가 닿는 손길이 익숙했다.


망태봉 전망대까지 가는 길은 자연의 소리로 황홀했고 자연의 향기로 평온했다. 12시, 등대가 있는 작은 섬으로 가는 길, 열목개가 열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전망대 벤치에 앉아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소매물도가 사랑한 등대섬, 아님 그 반대, 아님 둘 다



정면에 보이는 등대섬을 내 맘 가득 담아보았다. 5개 낮은 건물의 오렌지빛 빨간 지붕이 섬의 초록빛과 잘 어울렸다. 정적의 바다를 내 눈 가득 채워 보았다. 바다는 무심한 듯 잠잠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크고 작은 섬들이 사이좋아 보였다. 그들은 따로 또 같이 하나였다.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라바> 에서 화산섬 그는 사랑할 누군가를 오래 기다리다 결국 그녀를 만난다. 사실 그녀도 그를 기다렸으니, 둘은 서로를 끌어당긴 힘으로 결국 함께 있게 된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에게도 이런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숨어있지 않을까.



밀고 끌어당기며, 지켜보며 내려다보며



30분 뒤, 열목개가 활짝 열렸다. 등대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바닷속에 풍덩 빠질 듯한 급경사였다. 바다로 내려가는 마지막 계단이 제일 힘들었다. 경사가 매우 급하고 계단 사이 간격이 높아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리는 산책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소매물도에 왔는데. 과거의 나와 남편은 이 계단의 존재를 어째서 까맣게 잊은 것일까. (인정하기 싫지만, 그땐 20대의 체력이었다.) 지난번 치악산​에서 7시간 혹사한 우리의 다리가 아직 회복 중인 상태였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정성 들여 한 칸씩 내려갔다.


결국 모세의 기적 같은 열목개 위에 섰다. 양 옆으로 파도가 찰랑 거렸다. 몇 분 전만 해도 물속에 잠겨있었던 바위들이 지금은 일광욕을 하듯 한가로이 햇살을 쬐고 있었다.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는 바위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바다는 점점 멀어지고 길은 점점 넓어졌다



바위들은 영화 <겨울왕국2> 에 나오는 트롤처럼, 크기가 다양하고 모양이 동글동글했다. 떼구르 굴러가서 팔다리를 쫙 펼치며 트롤이 귀여운 얼굴을 내밀 것 같았다. 사람들이 걸어가는데 데굴데굴 소리가 났다. 어떤 바위는 딸아이의 무게에도 휘청거렸고, 또 어떤 건 남편의 무게를 오롯이 버틸 만큼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바위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있었다.


몽돌길 위에서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인생의 무게를 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버티기 벅찰 때는 몽돌처럼 떼굴거리며 어깨에서 내려놓을 용기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레드 카펫처럼 등대섬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몽돌길은 내게 비움의 용기를 말하고 있었다. 다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모두 다 짊어지지 말고, 적당히 내려놓아라고.






나와 남편은 15년 만에 같은 자리에 다시 왔다. 아기가 태어나서 중학생이 될 만큼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배우고 성장했을까. 그동안 나는 얼마나 나를 사랑했을까. 그리하여 나는, 2009년의 나를 떳떳이 마주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5년 전의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넸다. 


“지금 너의 옆에 있는 남자를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 줘. 네가 힘들 때마다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야. 그리고 몇 년 뒤에 날개 없는 천사가 너에게 갈 거야. 의심하지 말고 아끼지 말고 매일매일 사랑을 듬뿍 줘. 네가 줄 수 있는 그 이상의 사랑을 그녀는 너에게 줄 거야.


친구들 속에서 너를 찾지 말고, 고독 속에 숨어있는 너를 꼭 찾아서 만나. 너는 있는 그대로 충분한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구하지 말고. 너 스스로 인정하고 보듬어줘.“


그러면 너는,
너로 살 수 있을 거야.

여유롭게
풍요롭게.



다시금 나를 마주한, 그 시간 그 장소



2009년의 나는, 여기 소매물도에 공들인 그 시간 속에서, 마법처럼 길이 열리는 그곳에서, 2024년의 나를 만났다. 철썩이는 파도 사이, 달이 바닷물을 끌어당기며 과거가 미래를 끌어당기며. 열목개에 물이 달아나며 15년의 시간이 증발하며. 모든 움직임이 정지한 찰나, 나를 마주한 과거의 다정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동안 잘 살아냈구나.

난 너의 애씀을 알 것 같아.

넌 그런 사람이니까.


지금 그대로 너의 길을 가.

내가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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