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임 매듭의 오늘
2월의 겨울이 좋다. 새해다짐으로 진중한 1월보다, 꽃샘추위가 기다리는 3월보다 좋다. 겨울이지만 입춘이 있고, 춥지만 따스한 날이 많아 좋다. 올챙이알이 태어나고, 꽃봉오리가 터트릴 준비를 하는 2월이 좋다.
오래전 2월의 좋은 어느 날, 내가 태어났다. 나의 딸과 남편은 나에게 받고 싶은 생일선물이 뭔지 물었다. 나는 자연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경험은 누구나 똑같이 살 수 있는 물건과 다르니까. 그 가치는 온전히 즐기는 사람에게 달려있으니까.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행동
속에서도
수만 가지
다른 경험이
탄생하니까.
그저 이맘때의 겨울산을 가고 싶었다. 그게 치악산이 되었다. 가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새하얗게 우아한 소백산을 보았다.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번엔 설산 산행을 계획하지 않았기에. 소백산은 우리에게 더 큰 용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구룡야영장 카라반에서 따스한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 밤새 눈이 온 걸 알았다. 그리고 눈이 계속 내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대설주의보로 입산통제가 떨어졌다. (구룡에서 세렴폭포까지 구간을 제외하고.)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우리는 폭포까지 트레킹 하기로 하고 느긋하게 아침밥을 챙겨 먹고 길을 나섰다.
눈은 멈춤 없이 내렸다. 우리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눈이 사르르 와닿는 느낌이 좋아서,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송이가 귀여워서, 뽀드득 걷는 소리가 재밌어서. 야영장 근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30분을 그렇게 보냈는데. 입산통제가 해제된 걸 남편이 확인했다. 우리는 결정해야 했다. 이 눈을 뚫고 비로봉에 오를 것인지, 그냥 가던 대로 트레킹을 계속 갈 것인지.
퐁퐁 쏟아지는 눈에 마음이 비로봉으로 이끌렸다. 한 시간 뒤, 우리는 황골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아스팔트로 포장된 급경사 임도를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뽀얀 눈과 놀고 싶어 하는 아이와, 늦게 출발해서 조급한 아빠가 끊임없이 실랑이를 반복하며. 12시 30분, 황골탐방로 입구에 도착했다. 동절기 입산가능시간을 30분 남겨두고. 우리 뒤로 등산객은 더 이상 없었다. 남편과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우리 오늘 괜찮을까 걱정하는, 우리 잘할 수 있을 거야 다짐하는, 그런 애절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하얀 눈이 쌓인 등산길을 살방살방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올라갔다. 바람 한 점 없었다. 눈의 담요를 덮은 듯 포근했다. 안개에 둘러싸여 적막하고 고요했다. 이제껏 보지 못한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내가 움직이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
작은 천사 같은
눈꽃송이로 가득한
산속의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치며 인사를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우리뿐이었다. 산과 눈과 우리. 계곡 물이 쏴아 내려가는 소리도 점점 멀어져 갔다. 눈이 사뿐사뿐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몰아쉬는 숨소리와 감탄의 소리만 남았다. 발걸음의 뽀득거림과 함께.
어느 순간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능선을 따라가는 길에서. 하얀 상고대 눈꽃나무들이 가득 서 있었다. 안개 자욱한, 눈발 날리는 겨울의 설산을 우리는 걷고 있었는데. 어째서일까. 오색찬란한 꽃들이 가득한, 햇살이 부서지는 어느 봄날의 정원 속에 있다는 착각이 드는 건. 하나의 색은 수십 가지 빛깔이 되었고, 눈꽃 저마다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정답고 다정했다.
안개 속을 가득 채운
알알이 물방울들이.
나무에 달라붙어 얼음 결정을 만든
다른 물방울들이.
눈송이가 되어 그 얼음 위에 앉은
또 다른 물방울들이.
이 모두를 다 품에 안고
서 있는 나무들이.
모두가 각자의 색으로 빛이 났다. 눈부시게 다채롭게.
시간은 야속하게 앞으로만 자꾸 갔다. 가는 시간을 잡을 수가 없어 우리도 따라가야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갈등해야 했다.
시간에 쫓긴 채
애써 떠나려고 하는
‘냉정’과,
시간을 들여서
오래 같이 있고 싶은
‘열정’ 사이에서.
나는
불쑥불쑥
올라오는 불안함을
도장 찍듯
꾹꾹 누르고 있었다.
꾸욱 누를 때마다
찐득한 잉크 같은
담대함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나의 딸이 지칠 만도 했다. 처음 착용해 본 아이젠과 스패츠가 그리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편도 4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눈을 밟으며 올라가는 건 상상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내려오는 어르신 등산객들이 힘들어하는 나의 딸에게 간식과 함께, 따뜻한 격려를 듬뿍 꺼내주셨다. 오늘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유일한 어린이 등산객인 용감한 그녀에게.
비로봉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우리는 안도했고 감격했다. 셋이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은 그쳤으나 안개는 가득했다. 한 사람이 2년 동안 쌓았다는 전설 같은 미륵 불탑 3개가 눈에 덮인 채 고고히 서 있었다. 몇 안 되는 등산객들은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길로 내려가고 우리만 남았다. 하얀 안개 속에서 눈꽃 가득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다시 우리 셋 뿐이었다.
잠시 침묵 속에 앉았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안개는 다른 그 무엇이 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이 모습 이대로 충분했다.
안개가 안개일 수 있는 곳.
안개를 안개로 받아주는 곳.
안개는 그저 안개이면 되는 곳.
그동안 나는 지쳤었다. 나는 가끔 다른 누구여야 했고 때때로 나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종종 나이면
안되었다. 나 자신조차 그저 나이길 거부하진 않았을까. 오늘 이 아득한 안개 속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였으며 그 어느 곳에서보다 안전했다.
다시금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작은 물방울 같은 끈기를 끌어모아 다시 내려갈 대담한 열정이라는 결정체를 만드는 중이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안개가 되고 상고대를 만들듯이.
내려가는 길은 풀리려는 다리근육을 다잡아야 하는 끈기였고. 해 지기 전에 하산하려는 우리의 열렬함이었고. 기억나는 장소를 되짚어가는 인내의 빨리 되감기였다. 에너지바를 건네주신 할아버지를 만났던 계단을 지나, 0.3km가 얼마나 긴 거리인지 실감한 비로봉 표지판을 지나, 다시 내려가는 길이 나와 좌절했던 헬기장을 지나, 상고대가 정원처럼 화려했던 능선을 지나, 산새들이 날아왔던 황골쉼터를 지나.
어느새 하늘이 개어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마지막 급경사길을 내려갔다.
붉게 타는 노을을
마주 보며
내 마음도
뜨끈해졌다.
위대한 자연에게 건네받은 감동과 무사히 내려왔다는 감격과 우리가 끄집어낸 용기에 대한 감탄이 뒤섞여 내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듯했다. 우리가 주차장에 도착하는 순간, 하늘은 비로소 어둠의 장막을 드리워 주었다.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웠던, 우리의 7시간이 그렇게 저물었다.
우리 가족에게 받은 나의 생일선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예측할 수 없었고 그만큼 놀라움이 가득했다. 힘든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고 그 이상의 즐거움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지난번 못 갔던 함백산 눈꽃산행의 여러 번의 꼬임은 결국 오늘이라는 선물의 매듭이었다.
일기예보에 없었던 눈이었다. 오늘 아침 대설주의보가 지속됐을 수도 있었다. 입산통제 해제를 몰랐을 수도 있었다. 결정의 순간 우리는 가던 계곡 트레킹을 그대로 갔을 수도 있었다. 등산을 포기하고 일찍 내려왔을 수도 있었다. 그 수많은 변수 속에서, 눈이 왔고 입산통제가 해제됐으며 우리는 7시간을 눈과 함께 치악산에 있었다.
우리는
오늘을
온전히 누렸고,
나의 선물은
비로소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