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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Apr 05. 2024

반전인 줄 알았던 이야기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드디어 오늘이다. 태백산 민박촌에 새하얀 아침이 밝아왔다. 이틀 동안 눈이 많이 왔다. 우리 가족 최초 설산 산행을 위한 준비는 다 되었다. (아니 다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 셋은 기대와 긴장감으로 상기된 얼굴을 똑같이 하고서 함백산으로 향했다.





얼마 뒤, 우리는 만항재 쉼터 옆 천상의 바람길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길을 잘못 든 게 아니었다. 등산을 다하고 온 것도 아니었다.


이른 아침 제설작업이 미처 안된 오르막에서 우리의 승용차는 힘없이 밀렸다. 속수무책이었다. 등산로 입구로 가는 그 고개를 넘지 못해 결국 등산을 포기했다. 근처 만항재에 왔더니 주차난이 우릴 기다렸다. 생딸기로 딸기청을 만드는 듯한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하루치 에너지는 고갈되어 버렸다.


우리는 침울했어야 했다. 2달 전부터 계획하며 설레었던 눈꽃 산행 프로젝트였다. (1시간 짜리라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결심이었던가.) 실망과 피로감이 묵직하게 몰려오는 찰나였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낡은 옷장 속에 가득 찬 옷을 헤집고 겨울 세계로 들어간 <나니아 연대기> 속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딸은 눈 위를 뛰어다니며 어느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설경은 우리가 이미 일어난 일을 곱씹는 미련함에 시간을 투자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1초 전에 완료된 1시간 40분짜리 미적지근한 우여곡절은 눈부시게 하얗고 차가운 눈 속에 속절없이 녹아 사라졌다.


여기가 운탄고도 1330 5길이라고 표지판이 알려주었다. 어디가 끝인지 얼마나 더 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우린 그저 걸어갔다. 길은 걸을수록 그윽해졌다. 딸아이의 눈빛에는 경이로움이 가득 차고, 남편의 얼굴에는 은은한 평화로움이 번져 있었다. 우리 셋은 민박촌을 출발할 때와 또 다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믿기지가 않았다



갓 내린 눈은 아직 보송보송했다. 바닥에 쌓이고 쌓여 다져진 눈은 발 밑에서 베이킹소다처럼 뽀득거렸다. 길 옆으로 쭉 늘어서 있는 나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듯이, 하얗고 복슬한 눈 옷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본다면 모델이 표현한 옷의 자태를 흡족할 만큼.



풍력발전기 너 마저



남편의 등에 매달린, 혹시나 해서 준비해 온 빨간 썰매가 나설 차례가 되었다. 내리막길이 나타나자 나의 딸은 빨리 타고 싶어 다급해졌다.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나눠주듯 그녀는 웃음보따리를 썰매에 싣고서 온 세상에 웃음을 나눠주며 내려갔다. 뛰어다니다가 덥다고 진작에 벗어던진 모자와 마스크의 빈자리는 나의 딸의 볼과 귀를 발그스레 물들였다.



흩날리는 마법가루에 변신한 구름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날이었다. 나뭇가지 사이사이 살포시 앉아있던 눈이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사르르 날아갔다. 쏟아지는 햇살에 날리는 눈가루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자연의 마법이었다. 사르르 사르르 뾰로롱. 기쁨, 설렘, 충만, 평온의 곱디고운 가루들이 뒤섞여 우리 머리 위로 흩뿌려졌다. 하얀 겨울산에서 눈꽃가루를 맞으며 나는 밀려오는 감동에 어쩔 줄을 모르고 한참을 서 있었다.








눈이 바람에 날리는 사각거림과 햇빛에 부서지는 눈부신 반짝임. 오늘 우리 가족은 등산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지만 몇 번의 꼬임으로 방향이 틀어져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마이클 싱어가 쓴 책 <될 일은 된다>에서 말한 ‘내맡기기 실험’처럼 오늘의 흐름에 우리를 그저 내맡겼다.


태어나 처음 보는 풍경을 마주했고 자연과 하나 되는 우리를 발견했다. 있는 그대로의 위대한 자연을 경외심으로 바라보았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보는 눈이 아니라, 자연 속에 눈의 세계를 나의 딸은 알게 되었다.


이걸로 충분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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