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네가 좋아
고요하다. 오후 3시에 만난 짙은 새벽의 적막함에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어릴 적 장난감 가게에서 갖고 싶은 걸 고를 때의 그 말랑거리는 긴장감이기도 했고. 책을 읽다가 마주친 어느 글귀가 가슴에 와닿아 자꾸만 곱씹게 될 때의 그 떨리는 애틋함이기도 했다.
고요의 바다는
몽글거리는 비누거품처럼
내 마음에 와닿아
퐁퐁 터지며
말을 걸어왔다.
우리 가족이 한려해상 생태탐방원에 도착한 첫날. 자연의 집 앞 데크에 의자를 펼치고 앉았다. 추위도 잊은 채, 나의 추억회로는 어느새 남해를 처음 왔던 과거를 찾고 있었다. 그저 예쁜 사진을 찍기 바빴던 내가 있었다. 예쁜 바다. 예쁜 하늘. 예쁜 몽돌. 예쁘게 보여야만 하는 나. 모두 다 예쁘게 찍어서 가져야 했다. 실제보다 더 예뻐야 했다. 그 왜곡되고 피상적인 예쁨을 그 후로 꺼내보지 않는다는 것도 모른 채.
다시금 나의 두뇌는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바다를 집중 조망했다. 세월이 지나, 사랑스러운 딸과 남편과 함께 남해를 다시 찾은 오늘. 놀랍게도 눈길 닿는 모든 것이 마음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보이기 위한, 소유하기 위한 예쁨의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사진은 실제의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다 담아내지 못했다. 내 마음의 눈과 심장만이 본질에 가까이 가 닿을 수 있었다.
위대한 자연 속에서
모든 생명체는
구태여
꾸미지 않아도
본연의 가치로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바다의 파란. 고즈넉이 서있는 몇몇의 섬. 수평선 더 멀리 보이는 섬들의 능선.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들의 대화. 양식장이 있고 낚싯배가 유유히 다니는 잔잔한 수면. 그 위로 부서지는 햇살 파편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은은한 바다내음. 나는 그저 바라보았고 들었고 맡았고 느꼈고 깨달았다.
사람은 엄마 같은 자연의 품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취미를 즐기고 나처럼 위로를 받기도 한다.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차별도 없는 무한한 긍정과 끝이 없는 사랑이었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온전히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
절대적으로.
여기서 우리는, 두 번의 불타는 노을과 두 번의 별 헤는 밤과 두 번의 환하게 울려 퍼지는 아침을 함께 했다. 자연의 웅장함을 때로는 호기심으로, 때로는 가슴 떨리는 감동으로 지켜봤다. 나의 남편은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나의 딸은 집에서 가져온 책을 읽으며.
동해바다만 보고 자란 나에게 바다는 파도 그 자체였다. 철썩거리며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의 부산함과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의 향연이 화려한 동해는, 에너지 넘치는 나의 20대였다. 부딪혀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똑같은 열정으로 파도를 만들어 달려가고. 부딪혀 거품을 내며 물러나다가도 다시금 즐겁게 출렁거리며 파도를 타는. 삶에 지칠 땐 그 소란한 파도가 근심을 때려주기도 하고 고민을 씻겨 주기도 했다.
그 격렬한 파도를 병풍처럼 둘러 서있는 섬들이 다 막아서 고요해진 남해는, 어떤 일이 닥쳐오든 흔들리지 않는 판단으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나의 40대이기를 희망해 본다. 공자는 40세에 미혹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아직도 부딪히고 소란스럽고 흔들리고 때때로 무너지기에.
삶이 고달플 땐,
이 잔잔한 바다가
내 마음속 혼란을
잠재워 줄 것이고
내 주변의 소음을
침묵시켜 줄 것이다.
2024년 새해, 한려해상에서 우리의 3일은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을 모아 담은 별주머니였다.
만지2호를 타고 자동차가 없는 섬 만지도에 가서 나무에 자란 풍란을 본, 별 하나. 출렁다리를 건너 간 연대도에서 300 여살 할아버지 소나무인 곰솔을 만난, 별 하나. 파라다이스호를 타고 한산도에 가서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를 썼던 제승당을 둘러본, 별 하나.
생태탐방원 자연의 집에서 밥을 챙겨 먹고 보드게임을 하며 많이 웃었던, 별 하나. 2층에 올라가 창문으로 보이는 별을 세며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었던, 별 하나.
숙소 앞 데크에 앉아 고요의 바다와 잔잔한 평화로움을 마주하게 된 일은, 주머니 속 가장 큰 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