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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May 03. 2024

또 다른 세계의 지평선

나의 존재를 알아본다는 것



바람소리가 싱그러웠다. 나뭇잎은 간지럽다는 듯 웃으며 흔들렸다. 산들바람은 키득거리며 저 멀리 달아났다. 사르르, 벚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기는 달달했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냄새가 났다. 어디든 자리를 잡고 앉아서 몇 시간이고 명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봄날의 산은 온통 연둣빛이었다. 햇살은 적당히 따스하고 성장하기 좋은 날이었다. 새싹은 잎을 틔우고 자라고 커지고 있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갓 태어났거나 한창 자랄 때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함과 새로움이 향기로웠다. 나는 잘 자라고 있는 걸까. 나는 오늘, 어제와 다른 새로운 잎을 싹 틔울 수 있을까. 나는 오늘, 봄날의 탄생 속에서 같이 성장할 수 있을까.






월출산 천황사지구 표지판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탐방로 입구가 좋아졌다. 한 뼘 차이인데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매번 완전히 다른 곳이 나타났다. 다른 차원의 세계로 순간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복잡한 주차장과 등산객들의 소란함을 뒤로하고. 나를 소모시키는 사회생활의 스트레스를 잊는다. 나이 들어가시는 엄마의 건강에 대한 걱정을 잊는다. 딸에게 나는 과연 좋은 엄마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잊는다. 남편에게 좀 더 상냥하지 못한 미안함을 잊는다. 나도 늙어감을 인정해야 하는 씁쓸함을 잊는다.


탐방로 입구를
들어서며

나는
있는 그대로
완벽한 영혼의
내가 된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몽글몽글 포근해졌다. 딸, 며느리, 엄마, 아내, 직장인, 어른의 이름을 모두 벗어던진 채.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맑은 공기 속을 계속 걸어갔다. 길 위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벚꽃 잎을 바라보며.





천황사를 지나면서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급경사와 큰 바위가 끝도 없이 아득해 보였다. 도봉산​ 암릉이 생각났다. 도봉산에서 처음 본 난간봉은 다소 위협적일 정도로 낯설었는데, 몇 시간 산을 타면서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 봉이 지금 간절해졌다. 하지만 난간 설치는 자연이 아파할 수 있으니 여기서 더 이상 바라지 않기로 했다. 등산 스틱도 별 도움이 안 되었다. 그저 나의 가난한 다리 근육을 믿고 천천히 올라갔다.


땀이 나기가 무섭게 바람이 불어와 땀방울을 날려 주었다. 우리 가족은 작년, 녹아내릴 듯 더운 여름부터 등산을 시작해서 몰랐었다. 4월은 등산하기에 너무나 좋은 날이었음을. 겨울의 한기는 사라지고 여름의 열기가 오기 전, 완벽했다. 암릉을 타느라 데워진 몸의 열기를 식혀줄, 딱 그 정도의 상쾌한 바람이 내 피부와 기분을 간지럽혔다.





어느새 구름다리에 도착했다. 두 개의 봉을 연결한 이 빨간 다리의 깜찍함을 어쩜 좋을까.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어쩜 이리 잘 어울릴까. 다리는 그 어떤 색이라도 어울릴 것 같았다. 여기는 그런 곳이었다. 모두를 포용하는 풍경이었다. 남도 평야지대에 혼자 우두커니 솟아오른 월출산은 그렇게 너와 나, 우리를 아늑하게 감싸고 있었다.


오랜 세월 같은 비와 같은 바람을 맞았으나 서로 다른 모양으로 조각된 기암괴석이 줄지어 있었다.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비교하지 않음을, 고유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음을, 그리하여 같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각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면서.





내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딱딱한 덩어리가 흐물거리며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난 평생을 경쟁하며 살아왔는데. 그 속에서 어린 나는 얼마나 많이 부딪히고 상처받고 아파했는데. 이만큼 어른이 되어도 사회는 여전히 내가 누군가와 겨루기를 원하는데. 그 네모난 링 안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알게 되었다. 그저 내 두 발로 링 밖으로 걸어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간단하고 명료했다. 애초에 그 어떤 경쟁도 증명도 인정도 필요 없었다. 충만한 나를 알아보기만 하면 되었었다. 저 건너 기암절벽을 이렇게 바라보듯이.








탐방로 입구로 다시 나오며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지구별에 살고 있는 나로 돌아왔다. 감기 기운이 있는데도 구름다리까지 끈기를 만들어 낸 나의 딸이 고마웠다. 암릉을 힘겹게 오를 때 나와 딸의 손을 잡고 이끌어준 남편이 고마웠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며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촉촉하게 퍼져 나왔다. 나는 좀 더 관대한 아내가 될 수도, 좀 더 현명한 엄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편안하게 그저 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연둣빛 새싹 하나가
내 마음에
삐쭉 솟아난 듯

나는 조금 성장했다고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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