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음의 바다 Jun 11. 2024

지켜준다는 것

그 애틋함에 대하여



새벽 5시 26분. 눈이 자연스레 떠졌다. 천장에 달린 기다란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잔잔히 퍼져 왔다. 기분이 산뜻했다. 설레기까지 했다. 이 시간에는 눈 떠 있는 날보다 감고 있는 날이 많기에. 요란한 알람소리도 날 깨우기가 쉽지 않은데. 빛이 툭, 나를 흔들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눈부시게 끈기 있는 침묵으로.


북한산 사기막야영장에서 맞이한 첫 아침이었다. 동서남북 어딜 봐도 진초록의 바다였다. 6월의 자연은 힘을 다해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온갖 소음에 지쳐있던 내 귀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두둥실 떠오르는 풍선처럼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야영장 입구에 있는 둘레길로 들어섰다. 동네 뒷산같이 친근한 길이 이어졌다. 나무그늘 덕분에 산속은 시원했다. 물이 쩔쩔 끓는 냄비 같은 어제의 더위는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다. 먼 듯 가까운 듯 군인들의 훈련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딸과 나에겐 어떤 의미도 없는 소리일 뿐이었지만. 남편은 반가워하며 그 소리를 해석해 주고, 그의 라테 군대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너무나 많이 들은 이야기라 웃었고, 딸아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아빠가 즐겁게 이야기해서 웃었다.


어느덧, 구수한 된장찌개 같은 오솔길이 끝이 났다. 마라탕 같은 쎈 맛의 암릉이 기다리고 있었다. 등산스틱은 가방에 꽂아 넣을 때였다. 두 손을 다 쓰며 난간봉이든 뭐든 잡고 올라가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잡은 나뭇가지는 아기 피부처럼 보드라워져 있었다. 커다란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아름드리 소나무를 보았다. 한 줌의 흙으로 버텨낸 생명력 앞에서 지금 내가 힘들다고 할 수 있을까. 강렬한 매운맛은 짧고 굵게 지나갔다. 숨은 벽이 짠 나타났고 누룽지 같은 푸근함이 찾아왔다. 마당바위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숨은 벽. 숨바꼭질하듯 왼쪽 인수봉과 오른쪽 백운대 사이에 가려져있는 암벽을 1970년대 어느 산객이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연회색 암벽과 짙은 초록의 숲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서로를 돋보이면서. 서로가 돋보이면서. 아찔하게 숨은 벽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였고 더 멀리 백운대의 태극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반대쪽 저 멀리에는, 아파트 건물들이 까마득히 내려다 보였다. 이 거대한 산봉우리 앞에 잿빛 아파트 숲은 괴이할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 마음은 이 산속이 내가 사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의 눈 깜빡임 같은 짧은 시간이 1시간 30분이 되었다. 몸과 영혼을 초록으로 흠뻑 물들이는 동안, 시간은 우리를 지나쳐 흘러갔다. 고양이 두 마리가 슬금슬금 옆으로 와 앉았지만 우리는 줄 게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등산객을 차례대로 친절히 방문했지만, 그들이 뭘 먹는 건 보지 못했다. 비를 맞아 싱싱해진 텃밭 채소처럼 휴식으로 생생해진 우리는 야영장으로 내려갔다. 고양이 두 마리가 어떻게든 잘 먹고 지내길 바라면서.








“왜 군인이 되고 싶었어요?“


국군의 날을 기념해서 숙제로 군인에게 편지 쓴 적이 있었다. ‘군인아저씨께’로 시작해서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끝맺음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 쓸 수 있을 정도의 내용으로. 내가 편지를 쓴 사실조차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답장을 받게 되었다. 정갈하고 반듯한 글씨체로 내 이름을 다정히 적어서.


‘내가 군인이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야’라고, 지나쳐도 될 법한 어린 질문에 상냥하게 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나에게 ‘군인아저씨’라는 호칭은 군인친구가 되고 군인동생이 되고, 어느덧 군인조카가 되었다. 이만큼 나이 들어 돌이켜보니 답장을 써준 그 젊은 군인의 마음이 애틋해졌다. 자신의 의무를 다짐하듯 어린이에게 이야기하며 써 내려간 그 마음이.


나와 남편의 결혼기념일을 3일 앞둔 날이었다. 나는 결혼을 한다는 것이, 가족을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었다. 30년 넘게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 같이 산다는 현실이 대체 무슨 뜻인지 몰랐었고, 엄마가 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직접 부딪히고 아파하고 고뇌하고 깨닫기 전까지.


나는 그동안 우리 부부의 사랑을, 신뢰를, 믿음을, 얼마나 지켜냈을까, 아니면 야금야금 갉아먹었을까. 나는 남편에게 기대기만 했을까, 아니면 든든하게 기대고 싶은 사람이었을까. 남편이 힘들 때 같이 힘을 내 버텨주었을까, 아니면 남아있는 힘 마저 빠지게 했을까. 아내로서, 엄마로서, 셀 수 있는 힘듦보다 눈부신 사랑을 셀 수 없이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잊고 살아왔을까.





북한산 주변에 근무하는 군인들을 생각한다. 젊음으로 빛나는 그들의 버텨내는 시간을 생각한다. 오래전 나에게 편지를 보낸 군인의 애씀을 생각한다. 나라를 지켜내는 모두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배운다.

지켜주는 것이, 지켜내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버텨주는 것이,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매거진의 이전글 피고름이 터진 후에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