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되는 것들
그런 날이 있다. 평소에 그저 듣고 넘겼던 말이 가시가 되는 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목에 걸려 켁켁거리게 되는 날.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아침 10시 속리산 세조길 위에서. 나는 걸으며 아름다운 순간마다 감동받고 있었고, 남편은 빨리 가자는 재촉을 오늘만 5번째로 할 때였다.
남편은 뼛속까지 T(Thinking, 사고)이고 나에겐 F(Feeling, 감정)의 피가 흐르고 있다. 어디를 가든, 그는 시간 관리에 벽돌처럼 철저해지고, 나는 한순간도 놓치기 싫어 공처럼 말랑해진다. 우리에겐 단단함과 유연함 둘 다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 둘이 부딪혀 서로의 한계점을 벗어나는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 피부에 종기는 진작에 생겼었다. 오늘 기어코 그걸 건드려 피고름을 내고야 말았다. 나는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섰다. 휘릭 등산가방을 벗어 내리고, 바짝 마른 입으로 물부터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진심으로 말했다. 난 도저히 이렇게 못 가겠다고. 집으로 가자고.
시간에 쫓겨 앞만 보고 가기 싫었다. 이제껏 내 인생이 그러했으니. 순간에 충실하고 싶었다. 깨어있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여기 없었다. 문장대를 찍고 내려와 밤늦게 집에 도착한 뒤 피곤할 내일에 먼저 가 있었다. 그의 견고한 벽에는 반짝이는 숲 속의 봄빛 한 줄기도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정적이 흐르고, 아슬아슬한 대화가 이어졌다. 다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성의 끈을 잘 잡고 있는지 확인했다. 서로의 생각이 어떤지 들어보고 들려주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협상은 타결됐다. 속리산에서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즐거우면 될 일이었다. 한계점에 닿았을 때 어떻게 피고름이 나는지 우린 알게 되었다. 종기 응급처치는 30분이 걸려 마무리됐다. 등산가방을 다시 메고 걷기 시작했다. 우리 옆으로 저수지가 잔잔히 빛나고 있었다.
상수도 수원지는 초록빛과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맑은 물은 거울처럼 산과 하늘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수면 위는 또 다른 세계였다. 신비로운 기운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손을 넣으면, 물아래 새로운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 아닐까. 그럼 종기를 터뜨리기 전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물을 내려다보면, 내 영혼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수면 위에 나타나 나를 쳐다볼 것만 같았다. 이미 곪은 종기였고, 피고름을 내고 아파야 했다. 그래야 나을 수 있으니까. 나에게 달라붙은 끈적한 후회는 떼어내서 저수지에 흘려보내 버렸다.
이제는
기다려야 한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5월의 아침햇살은 싱그러웠다. 신선함은 공기를 타고 퍼져나갔다. 초록잎이 더욱 무성하도록, 꽃잎이 더욱 활짝 피도록. 나무마다 풍성한 잎사귀가 햇살을 적당히 가려주어 상쾌했다. 나무와 풀내음이 시원했다. 활기찬 생명의 힘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생명력은 향기가 되어 나를 또 살게 했다.
자연은 위대한 조향사였다. 어쩌면 오늘 내게 꼭 필요한 향기를 조합해 만들어 준 것인지도 몰랐다. 터진 종기의 쓰라린 아픔은 우주 밖으로 저 멀리 사라졌다. 자연이 내게 준 향기는 나를 순식간에 하늘 높이 보송한 구름 위로 데려다주었다. 사뿐히 앉아보았다. 달콤한 푹신함에 빠져들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저 아래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내가 내려다보였다.
등산길에 접어들었다. 초록 그늘 속을 걸으며 숨 쉬는 게 행복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자연 속에서 나도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감동보다 힘듦의 세기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체력이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산길이 그리 험하지도 않은데. 그늘도 많고 시원한데. 물은 왜 이리 계속 마시고 싶은지. 나의 딸은 말했다, 다리가 젤리 같아, 라고. 등산을 다니면 우리가 튼튼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얼마나 그 반대인지 알아가고 있었다. 주차장에서부터 5km 넘게 걷는 중이었다. 하루에 이렇게 많이 걸었던 적이 있었던가.
점심시간은 훌쩍 넘어갔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점점 많아졌다. 나의 딸에게 간식 세례가 쏟아졌다. 초콜릿, 에너지바, 젤리, 구운 계란까지. 하산하는 그들은 참으로 홀가분해 보였다. 우리는 땅으로 꺼질 듯 무거워졌다. 마지막 1km는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크고 작은 바위가 계속 이어진 경사길은 고무줄처럼 우리 눈앞에서 계속 늘어났다. 그 고무줄 끝에 거대한 암석 봉우리가 보였다.
문장대였다.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풍경은 막힘이 없었다. 거침없는 바람은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산은 연둣빛을 벗어나 초록이 진해지며 산맥의 윤곽을 분명히 드러내주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베이지색 암석은 숨바꼭질하듯 여기저기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는 것 같았다. 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텅 비었다. 내 마음 구석구석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빨래의 찌든 때가 빠지듯이. 신기했다. 머릿속이 단순해지고 담백해졌다. 흰색의 기분이랄까. 문장대를 내려오며 나는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3시에 늦은 점심을 먹고 우리는 착실하게 하산했다. 그리고 세조길로 다시 돌아왔다. 피부병 치료를 위해 세조가 이 길을 거닐었고, 피고름난 종기가 나았다고 했다. 우리 부부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고름이 빠진 자리는 아직 욱신거리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아팠던 만큼 더 단단해질 것이라 믿었다.
투명한 저수지는 여전히 차분했다. 맑은 물을 마주 볼 용기가 이제는 생겼다. 허점 투성이고 어설픈 내 모습 그대로 물 위에 뜨면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윙크해 줘야지. 너라서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