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와도, 괜찮다.
손발이 동상으로 얼어붙어도, 괜찮다.
괜찮지 않다.
아버님이 이대로 돌아가신 건, 괜찮지 않다.
아버님의 글이 사라지는 건, 괜찮지 않다.
그분의 명예를,
반드시 되찾을 것이다.
그 고매한 학문을,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나는 존경하는 아버지의 아들.
나는 회재 이언적의 아들, 이전인(李全仁)이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린다. 하늘거리는 벚꽃은 빗방울을 만나 꽃비를 내린다. 딸아이가 펼쳐든 우산 위에 꽃잎이 잠시 쉬어 간다. 연분홍빛 우산 아래, 해맑은 아이의 웃음이 촉촉하게 흩날린다. 구름을 부드럽게 끌어안은 하늘 아래, 고즈넉이 옥산서원이 서 있다.
회재 이언적이 무고하게 정쟁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이후 옥산서원에 그의 위패가 모셔지기까지, 20여 년이 걸렸다. 그 시간을 촘촘히 메꾼 건 회재의 서자, 잠계 이전인이었다. 그는 이언적이 친부임을 알게 되자, 곧바로 유배지로 찾아갔고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유배지에서 7여 년간 아버지의 학문을 전수받으며 부자간의 정을 나눴다. 이언적이 별세하자, 이전인은 부친의 시신을 직접 운구했다. 유배지에서 남긴 저술과 소장하던 서책들, 유품과 함께. 엄동설한 12월이었다.
평안도 강계(지금의 북한 지역)에서 약 1,000킬로미터를, 산길과 비탈길을 지나 태백산맥을 넘고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유배인의 장례길에 누구도 공적으로 도울 수 없었다. 탈진과 동상으로 지쳐갔으나, 곳곳에 숨은 정이 있었기에 험난한 여정을 버텨냈다. 포항 달전리 선영에 도착한 건, 이듬해 2월이었다.
이전인은 그 당시 이미 조선 성리학의 대가였던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 3년 간 아버지의 묘쇼 곁에서 시묘살이를 마친 직후였다. 이황이 만나주지 않자, 그는 아버지의 저술만이라도 읽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마침내 받아 든 책을 읽은 이황은, 그 학문의 깊이에 감탄했고 이언적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이 만남은 이언적의 학문이 이황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정통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전인의 효심과 학문적 헌신은 매서운 겨울을 견디고 봄볕 같은 이황의 겸손함을 만나, 마침내 꽃을 피웠다. 옥산서원은 그 20여 년의 슬픔과 기쁨의 눈물이 배어 있는, 한 떨기의 꽃이었다.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역락문을 들어선다. 서원의 첫 대문에 내건 마음에, 나 또한 발걸음이 즐거워진다. 2층 누각인 무변루에 올라 자연과 경계가 없는 공간에 앉는다면, 과연 어떤 숨이 내쉬어 질까. 굳게 닫힌 문 사이로 상상을 남기고, 단 하나 열린 문을 따라 서원 안으로 들어간다. 강학공간인 구인당으로 가는 길은 자로 잰 듯 단정하다.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마치 나도 어진 마음을 얻게 될까 싶어, 길 위에서 자뭇 진지해진다.
구인당 앞,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옥산서원 편액이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반짝인다. 신발을 벗고 반지르르한 마루 위로 조심스레 오른다. 수백 년 동안 수백 명의 깨달음이 침묵의 울림으로 가득 차 있다.
괜스레 앉은 자세를 바로잡다가 헛기침도 해본다. 반듯하지 못한 마음이 민망해 일어나 보니 또 다른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최초 사액 당시 아계 이산해가 쓴 것이 화재로 소실되어, 후대에 복각된 것이다. 역사가 기억하는 명필가의 편액을 안팎으로 마주하며, 이곳 젊은 선비들의 감정은 과연 어떤 모양의 서체였을까.
최근, 딸아이의 유치를 빼주었다. 내 새끼손톱보다 작은 아래 앞니가, 5년 전의 시작이었다. 이 하나씩 빠질 때마다 귀여워서 웃고, 아파할 때는 같이 울기도 하면서, 아기 이가 차례로 떠나갔다.
이를 빼던 날,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나의 딸이 이만큼 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직도 아기 같은 얼굴에 그 꽃잎 같은 입 안에, 이제 어른 이가 가득함을 받아들여야 했다.
처음 아기집을 확인하고 심장소리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초승달 같은 어여쁜 눈썹을 하고 동그란 얼굴을 내민 게 엊그제 같은데. 아이는 신나게 자라나고 나는 뜨겁게 눈물지었다. 내 품에 안겨 잠들다가 모유를 그만 먹게 된 첫 생일날, 물고 빨던 아기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 어느 날, 잡고 있던 엄마 손을 놓고 교문 안으로 처음 들어가는 뒷모습을 본 날에도.
아이가 성장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녀를 향한 나의 막대그래프는 점점 길어져만 갔다. 매해 새로웠고 매 순간 감격스러웠다. 울컥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날은, 해 질 녘 그림자처럼 그 끝이 어딘지 모른 채로 유난히 더 길어졌다.
이전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그를 만나러 강계로 가는 결심부터 시작이었다. 나처럼 눈가를 적시며 막대가 길어지던 순간 또한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강계에서 전인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시던 날, 그런 아버지가 멀리 떠나신 날, 이황을 만나 마침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게 된 날. 그리고 아버지가 홀로 학문을 닦았던 독락당에 아버지 없이 혼자 돌아온 날에도.
독락당은 이언적이 벼슬에서 내려와 자연을 벗 삼아 학문 수행에 정진하던 곳이었다. 가문에 피해를 주지 않고자 본가인 양동마을에 돌아가지 않고, 이곳 옥산 아래에 독락당을 지어 지냈다. 이후 왕의 부름으로 벼슬에 다시 나아갔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간 뒤, 강계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독락당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마법처럼 숨어있는 정자 계정(溪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대한 암석 위에 선 모습은 고고하면서도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아래로 흐르는 계곡은 수량이 많지 않은 이른 봄에도, 청명함의 깊이가 당당하다. 건너편에 빽빽이 서 있는 조각자나무(중국주엽나무)는 스산한 오늘의 날씨처럼 앙상하다.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계정 마루에 앉는다. 침묵이 감싸는 듯한 순간 자연이 가득 채워진다.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닌 곳이다.
이곳에 앉아있던 이언적을 생각한다. 이곳에 앉아있던 이언적을 생각하는, 이전인을 생각한다. 같은 공간에서 부자가 함께 하지 못한 애달픔이 계곡 따라 절절히 흐른다. 이전인을 위로해 준 건 무엇이었을까. 퇴계 이황의 손끝에서 태어난 옥산정사의 글씨, 아계 이산해의 필치가 살아 있는 독락당의 이름, 석봉 한호의 힘이 깃든 계정의 현판, 그리고 많은 이들이 남긴 방명록과 헌정 시의 글귀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전인의 마음을 다독여준 건, 비록 곁에 없지만 이 공간 어디에나 살아 있는 아버지란 존재였을까. 아버지가 마당에 직접 심은 산수유나무가 매년 착실히 피워내는 노란 꽃을 보는 일이었을까. 일 년 중 6개월을 맨몸으로 서 있는 조각자나무를, 아버지 같은 청렴한 군자상으로 마음에 품는 일이었을까.
고요한 독락당을 등지고 걸어 나온다. 연분홍 벚꽃이 품위 있게 문 앞을 지키고, 그 옆으론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진다. 봄비를 맞은 옥산은 구슬처럼 은은하게 빛이 난다. 언젠가 이전인이 올려다보았을 하늘 아래, 나도 조용히 서 있다.
“무잠계 무회재(無潛溪 無晦齋)”
잠계 이전인이 없었다면 회재 이언적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이전인의 노력 없이, 이언적은 역사 속에 묻혔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언적이 있었기에 이전인도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이었고,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딸아이의 우주와 같은 사랑을 받으며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녀의 존재 없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있기에 그녀도 있다. 우리는 엄마와 딸이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히 이어진 사이니까.
막대그래프는
한계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