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작은 수의 곱셈

by 맑음의 바다



봄과 여름 사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낮과 밤 사이, 나비 날갯짓처럼 마음이 간질거린다. 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새만금 방조제에 의자를 펴고 앉는다. 아직은 서늘한 저녁 공기가 내 피부에 사각거린다. 간간히 자동차가 흘러가는 4차로를 등지고, 오직 바다와 하늘을 마주한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 속에는 우리 가족이 처음 바라본 군산이 있다.








일제강점기, 군산은 드넓은 호남평야에서 수확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수탈의 기점이었다. 세관, 은행, 경찰서 등 각종 금융기관과 공공기관이 줄지어 들어섰다. 농토와 재산을 빼앗긴 조선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일본인 밑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나날을 견뎌야 했다.


햇살 아래 옛 군산 세관이 반짝였다. 빨간 벽돌과 파란 문을 지나 일제의 탐욕이 드나들던 통로였다. 조선의 땀방울이 맺힌 쌀과 자원들이 군산항으로 힘없이 끌려갔다. 잔혹한 시간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엔 깊은 흉터가 남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학교처럼 따뜻한 외관이, 오히려 그 아픔을 더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옛 군산 세관 (호남관세박물관)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멀리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부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고 1층만 주로 사용했다고 했다. 권위와 위압감을 주기 위한 건축 설계 의도가 떫은 감맛처럼 마음에 씁쓸함을 남겼다. 군산항을 통해 반출되는 쌀 수입금을 예치하거나 일본인에게 저리로 융자를 해주는 곳이었다. 그들은 은행 금고를 차곡차곡 채워나가며 우리 민족의 숨구멍을 틀어쥐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쌀밥은커녕 보리개떡과 쑥죽, 겨우내 말린 무청으로 끼니를 때우며 버텼다. 그 와중에 일본은 더 좋은 쌀을 골라내 최고 등급의 상품으로 만들었다. 하루 종일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서 쌀알 하나하나를 고르는 미선공(米選工)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폭언, 구타, 차별은 물론, 매우 낮은 임금마저 삭감하기 일쑤였고 일방적인 해고도 이어졌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군가의 딸이었던 그들.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뎌냈을지, 생각만으로도 입술이 바짝 말랐다.


군산항 기공 기념으로 쌓아 올린, 사진 속의 쌀가마니 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었다. 마을 축제인 듯 요란하게 꾸며놓아서 더 아이러니했다. 줄을 맞춰 서 있는 여인들과 배경 속 모든 것이 축하의 반대 감정선에 있었으므로. 수백 개의 가마니를 위태롭게 쌓아 올렸을 이름 없는 이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의 피와 땀, 눈물이 흑백사진에서 막 배어 나오는 듯했다.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군산근대건축관)에 전시된 사진자료



포목점, 농장 운영을 하며 큰 부를 쌓은 어느 일본인이 살았던 집에 들어갔다. 커다란 건물이 몇 채나 서 있고, 연못에 물고기가 헤엄치며 정원에 푸른 나무들이 무성했다. 2층 유리창은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뒷문 밖으로는, 마치 숨겨놓은 것처럼 언덕배기에 조선인들의 움막터가 보였다. 빼앗은 자와 뺏긴 자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대문을 드나들었을까. 인간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걸까. 정원이 눈부신 이 집에서 나는, 미로에 빠진 듯 혼란스러웠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히로쓰 가옥)



한 때 일본식 가옥이 즐비했던 신흥동 일대는 이제 카페, 서점, 알록달록한 상점들로 가득했고, 관광객 물결이 넘실거렸다. 깡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며칠을 일해야 1원을 벌 수 있었던 우리는, 6천 원짜리 커피를 후식으로 마시고 1만 원짜리 키링을 사는 우리가 되었다. 그때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 사이에 무엇이 채워졌을까. 시간인가, 집념인가, 아니면 잊어버린 무언가의 흔적인가.






장자교에서 바라본 대장도



군산에 있는 내내,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떠올랐다. 1985년 아일랜드, 부인과 다섯 딸아이와 함께 풍족하진 않지만 따뜻한 삶을 살아가던 빌 펄롱. 그는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펄롱의 엄마는 윌슨 부인의 집에서 일했다. 펄롱을 낳고 미혼모가 된 그녀를 기꺼이 받아준 사람은 윌슨 부인뿐이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후에도 윌슨 부인과 그 집에 일하는 네드 아저씨는 펄롱을 가족처럼 돌봐주었다. 그들에게 받은 사랑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향기였다.



선유도



어느 날, 아이를 학대하는 수녀원의 민낯을 목격하면서 그의 내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던 주변 사람들은 펄롱도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딸아이일 수도, 윌슨 부인이 없었다면 자신의 엄마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단단히 붙잡았다.


하얀 눈이 내리던 크리스마스.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일처럼, 그는 수녀원에 가서 그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자신의 삶 또한 누군가의 선택으로 가능해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데리고 가는 동안 그는 당당했다.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예상하면서도, 더는 위선 속에 머물지 않기로 했으므로.


그의 행동은 조용하고 묵직했다. 무엇이 그를 움직였을까. 어린 시절, 그의 세상이었던 윌슨 부인집 부엌 바닥 타일의 촉감. 면도법을 가르쳐 주던 네드 아저씨의 다정한 미소. 병문안을 갔을 때, 아픈 와중에도 윌슨 부인이 내민 따스한 손길. 작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런 순간들이 그에게 의미를 만들어 주었던 건 아닐까.



선유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고군산군도의 섬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군산에 물든 아픈 역사가 그렇듯, 자연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빛을 냈다. 나무는 초록으로 눈부셨고, 바다는 푸르고 고요했다. 파란 하늘은 드넓었고, 하얀 구름은 몽글거렸다.


섬 하나하나는 흩어져 있지만, 모여서 군도를 이루듯, 작은 기억들이 모여 한 사람의 마음을 만드는 것임을 알았다. 펄롱이 받아온 사랑의 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가 있었을까. 그의 감정은 섬을 둘러싼 바닷물결처럼 잔잔했지만, 멀리서 천천히 큰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1원을 귀하게 쓰던 잔잔한 물결이 모여, 1만 원을 신중하게 쓰게 된 오늘의 파도가 되었듯이. 내 마음속의 작은 무언가가 출렁이는 것 같았다.



신시도






새만금 방조제의 수평선 앞에서, 구름이 낮게 깔려 있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태양은 구름 속으로, 바닷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눈앞에서 흘러내린다. 수면 위에 붉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수평선 위에 넓게 펼쳐진 하얀 구름을 노랗게 파랗게 물들인다.





군산의 고독한 듯 고요한 자연과 일제강점기 가혹했던 역사의 얼룩이 내 영혼에 은은하게 번져든다. 키건의 소설이 겹쳐진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순간들이, 묵묵히 살아낸 하루하루가, 작고 조용한 것들이 하나 둘 모이면 흔들리지 않는 진실을 만든다.


펄롱처럼, 군산의 누군가도 소중한 이들을 조용히 지키고 있지 않았을까. 미선공으로 일한 어머니의 묵묵한 손놀림, 인력거를 끌며 뛰어다닌 청년의 날쌘 발걸음, 쌀가마니를 지고 군산항을 오르내린 아버지의 단단한 어깨, 영명학교에서 열정을 불태운 아이들의 빛나는 눈동자. 작은 수는 미미하다. 그러나 작은 수가 모이고 모이면, 그들의 곱셈은 큰 수가 된다.


역사를 움직인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같은 열사들의 결단 역시, 그런 작고 사소하지 않은 순간들이 곱해져 만들어진 커다란 결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라를 잃고 암울했던 시기,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낸 이들의 뜨거운 일상이 차곡차곡 쌓여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다.





말없이 존재하는 것들. 작지만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 바다처럼, 역사의 틈처럼, 한 사람의 선택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히 거기 있는, 구름 속의 태양처럼. 하늘을 가득 채운 우아한 빛의 퍼짐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묵묵히 견디고 살아낸 이들의 숨결이, 오늘 우리의 삶을 떠받치고 있다. 따스한 온기가 나를 감싸며 무한한 감동이 이곳에 머문다.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이처럼 사소하지 않은 것들의
곱셈이다.





해가 떠난 자리에 남은 빛처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