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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You Again

by 맑음의 바다



“하나, 둘, 셋, 넷…”


비가 그친 후 공기는 더없이 청명하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힘찬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은 깊은 숲 속에 들어올 틈을 찾지 못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상쾌함이 내 안에 퍼져나간다.


곧 나의 평화를 깨트리는 무리가 다가온다. 하이에나처럼 굶주린 모기들. 산길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왼쪽 허벅지를 네 번째 아니면 다섯 번째 긁고 있고, 참다못한 딸아이는 모기 물린 자국을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어느새 나는 숨을 헐떡인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을 오르기 때문인지,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다리를 긁고 있는 버둥거림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가쁜 숨 사이로 딸아이가 안심할 수 있게 말한다. 모기약 바르면 괜찮을 거라고, 거의 다 왔다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재차 말한다. 다산 정약용을 만나러 우리는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고.


더워진 몸을 식히려고 만들어진 땀방울이 내 얼굴과 등줄기에 스무 번은 흘렀을 즈음, 다산초당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의 숫자 세기는 열 하나, 열둘에서 끝이 난다. 다산 초상화를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본 뒤, 우리는 마루 끝에 털썩 앉는다. 주차를 하고 늦게 출발한 남편이 곧이어 도착한다. 상기된 표정으로 팔다리 여기저기 붉은 모기 자국과 함께.





다산은 유배생활 18년 중 10년을 여기서 보낸다. 가족과의 생이별, 신분의 몰락, 극심한 외로움이 수시로 그를 괴롭히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초당에서 차츰 심신을 회복한다. 채마밭을 가꾸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집필하면서. 그럼에도 귀양살이의 괴로움은 여전히 그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부부의 연을 맺은 지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병환이 깊었던 부인이 결혼할 때 입었던 치마를 유배지로 보내온다. 그 어여쁘던 다홍색이 바래져 노을빛이 된 치마를 유배지에서 받아 든 심정은, 나로선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기약 없는 시간 속에서, 다산은 그 치마폭을 잘라 자녀들에게 편지를 쓴다. 어머니의 노을 치마에 담겨있는, 유배 중인 아버지의 글은 그들에게 어떤 빛깔로 전해졌을까.





모기에게 습격당한 다음 방문객들이 10분 전의 우리와 똑같은 표정으로 다산초당에 도착한다. 그 심정을 잘 아는 우리는, 편하고 반듯한 마루를 그들에게 내어주고 일어난다. 초당 뒤편으로 동암을 지나, 천일각에 오른다. 나뭇잎이 살짝 흔들리며 한 줄기 바람이 들어온다. 사뭇 진지하게 바른 자세로 앉아, 다산의 시선 끝에 넓게 펼쳐진 강진만을 바라본다.


고요한 풍경 사이로 어제 들은 노래가 떠오른다. 먀~먀~미야오~ 노래를 부르던 작고 동글한 고양이. 리듬에 맞춰 타일을 눌러주면, 고양이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처럼 우아하게 춤을 추듯 날아다닌다. 아이가 게임하는 동안 남편은 흠칫 놀란다. 고양이가 구슬프게 부른 노래가 <See You Again>이었기 때문에. 남편이 1편부터 줄곧 팬이었던 영화 <Fast & Furious 7(분노의 질주: 더 세븐)> 주제곡이었기 때문에. 차분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노래는 이렇게 그리움을 불러낸다.



너 없는 하루는
정말이지 너무 길었어.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에,
다 이야기해 줄게.


영화 주인공이었던 폴 워커(Paul Walker)는 7편 촬영을 끝마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와 닮은 친동생이 남은 씬을 촬영했고, 이 노래는 추모 엔딩곡이 된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그를 향한 그리움을 진하게 담아서.



돌이켜 보니
우리 참 멀리도 왔네.

다시 만나는 날에,
내가 다 이야기해 줄게.



슬픔을 억누르듯 잔잔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애통함은 보컬 찰리 푸스(Charlie Puth)의 가성을 통해 깊어진다. 가족을 언제 다시 볼 지 알 수 없었던 다산의 마음이 이런 멜로디였을지 모른다. 부인의 치마폭 위에 써 내려간 글은, 어쩌면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는 그의 방식이었을까.





그런 다산이 버텨온 이 시간들의 무게를 생각한다. 가족의 그리운 빈자리에는 백련사 혜장 스님과의 우정으로 채워졌던가. 혜장은 다산이 세속적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맑은 거울이 되어주고, 다산은 혜장에게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지혜의 창이 되어준다. 그 순간만큼은 다산도 비로소 보통의 한 인간으로 숨 쉬고 있었으리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이 눈앞에 나타나고, 나도 모르게 다산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키 높은 초록의 여름 나무들 사이로, 그가 거닐던 순간을 상상한다. 따스한 봄과 낙엽 지는 가을, 눈 덮인 하얀 겨울을.


서서히 숨이 차는 오르막길에서 어느 순간부터 즐거운 내리막이 이어진다. 그 길 끝에는, 탁 트인 하늘 아래 푸르른 차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차나무를 지키는 듯 듬직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를 지나고, 반지르르한 잎사귀에 반짝이는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동백나무숲을 지나서, 마침내 백련사를 만난다.


안개 자욱한 만덕산의 넉넉한 품 속에 천년고찰이 안겨있다. 커다란 연잎이 한가득 펼쳐진 자그마한 연못이 있고, 그 뒤로 배롱나무가 진분홍빛 꽃을 흐드러지게 피어낸다. 다산이 혜장을 찾아갈 때의 반가움이 여기 연잎에 깃들어 있는 듯, 친구를 만나는 설렘이 저기 배롱나무 꽃잎에 스며 있는 듯, 아련하다.





혜장 역시 이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을 찾아올 때가 많아서, 다산은 늦은 밤에도 문을 열어둔다. 나이와 종교, 사상을 넘어서 삶의 빛나는 통찰을 나누던 두 사람. 이 만남은 다산의 유배생활에 깊은 안정감을, <목민심서> 등의 저술활동에 커다란 영감을 준다. 백련사 차밭에서 정성스럽게 따온 찻잎으로 다산과 혜장은 얼마나 많은 찻잔을 기울였던가. 따스한 물소리가 잔을 적시고, 그들의 웃음소리도 은은히 번진다.


충만함의 끝은 기어코 찾아오고야 만다. 다산이 평생 얻은 한 사람의 벗이었던 혜장이 39세의 나이에 요절했기에. 짙은 안갯속에서 길을 헤매듯, 애달픈 그의 마음은 갈 곳을 찾지 못한다. 찻잔을 기울이던 자리는 공허하게 비었고, 오솔길의 끝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텅 빈 숲처럼 적막한 쓸쓸함은 다시는 채워질 수 없다.



그대 없는 하루가
길고도 아득하도다.

훗날 다시 만날 날이 오면,
내 마음을 다 전하리다.





귀양살이를 끝내고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날 때에도, 혜장은 여전히 만날 기약이 없다.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낸 다산은 그 후 언젠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났을까. 아마도 어딘가에서, 혜장과 다시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나무 두 그루가

마주 보고 서 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오솔길 위에서.


뿌리줄기가

손가락처럼 얽혀,

오래도록

서로 힘이 되어준다.


다산과 혜장,

마치 그들처럼.





<See You Again>은 발매 이후 전 세계적으로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노래’의 대명사가 된다. 고양이가 부른 게임 노래 말고 원곡을 제대로 들어본 아이는 울상이다. 아빠, 너무 슬퍼. 남편은 진지하지만 다정한 눈빛으로 딸에게 말한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는 보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보내지만
보내지 않는 거야.











<See You Again>

- Wiz Khalifa ft. Charlie P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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