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살에 엄마를 울리는 사람 나야나.
대장암 4기를 진단받고 나서 지금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2021년 크리스마스 전날 작은 병원에서 난소에서 암이 발견되었고 그 암이 어딘가에서 전이된 것 같다는 말, 정확한 병명을 알기 위해 연말 - 새해를 국립암센터에서 보냈던 시간, 그리고 암이 여기저기 전이가 많이 되어 수술이 소용이 없으니 지금은 수술을 생각지도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
'아, 내가 진짜 암이구나...'라고 느꼈던 몸 안에 케모포트 삽입, 6개월 동안 2-3주마다 한번씩 진행한 12차의 약물 항암치료.
6개월 약물 항암치료 후 암 크기가 작아지고 암 수치가 많이 떨어져 수술을 권유한 의사선생님, 다른 큰 병원들에서는 항암치료로 하는 것이 낫다며 말렸지만 진행한 2차례의 수술, 그리고 41일간의 병원생활.
암 진단 후 이렇게 지금까지 약 9개월 (~10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워커홀릭처럼 일에 빠져 살던 삶에서 2주에 한번씩 병원을 다니며 스스로를 더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내가 원래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되었을 때조차 결국 무언가를 찾아간 시간.
나에게는 그런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동안 내가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것은 엄마의 눈물이었다. 30살에 그렇게 엄마의 눈물을 자주 보게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사실 살면서 엄마의 눈물을 많이 본 기억이 없었다. 내 기억속의 엄마는 늘 모든 것을 해결하고, 해결책을 찾는 슈퍼우먼 이었으니까.
그래서 가끔 보는 엄마의 눈물은 참 슬펐던 기억이 난다. 참다 참다 주르륵 터지는 눈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눈물 조차도 누군가가 들을까봐 꾹꾹 눌러서 흘리는 눈물이었음을 잘 알고 있어서.
2021년 12월. 정확한 암의 이름을 알려고 연말에 급하게 찾은 국립암센터에서 엄마와 이런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민정아, 너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어?"
"엄마, 나는 끝까지 생각하고 있어."
"엄마도 그래."
그리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그동안 모은 돈 전부를 엄마의 통장에 넣고 내가 투자한 주식들을 보여주며 주식 어플, 은행 어플, 핸드폰의 비밀번호를 엄마에게 모두 전송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내 삶이 끝이라는 생각을 하니 엄마가 내가 모은 돈이라도 쉽게 찾아쓸 수 있게하자는 생각이 강했나 보다.
결국 삶이 끝이 나지는 않아서 엄마에게 송금했던 돈을 일주일만에 다시 받기는 했지만 약물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 엄마와 나는 이미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외래진료로 찾았던 국립암센터에서 더 빠른 검사를 받기 위해 외래진료에서 응급실로 가서 검사들을 진행하고 검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그 짧은 몇 일간 엄마는 참 많이 울었다. 왼쪽에서는 누군가가 임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오른쪽에서는 누군가가 코를 골며 자고 있던 응급실에서 엄마는 속시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죽이며 휴지를 자꾸 눈가에 가져갔다. 나의 자식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그 마음을 아마 나는 100%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엄마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엄마가 운건 그 때가 끝이 아니었다.
응급실에서 병동에 입원을 한 기간에 저혈압으로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기절하며 쓰러졌을 때. 몸에 꽂았던 바늘과 수액을 다 떼고 샤워를 할 수 있게 된 날 샤워를 하고 오겠다던 딸이 침대에 눕혀져서 기절했다가 갓 깨어난 채로 병실에 다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새하얗게 질려서 떨리는 손으로 나를 바라보던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내가 아파서 미안해.."
엄마는 또 울었다.
6개월간 약물 항암치료를 하며 몇 번이고 혈액종양내과 교수님과 외래 진료를 볼 때마다 "수술이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을 하는 나를 보며, 그리고 "아니요. 생각도 하지 마세요."라는 답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울었다.
약물 항암치료 6개월 후 암 수치가 정상 범위에서 지속되고, 암 크기가 작아져서 수술 권유를 받았을 때에도 엄마는 울었다.
수술 권유 직후 큰 병원들을 돌아다니면서 수술 반대 의견을 들었을 때에도 엄마는 울었다.
1차 수술을 하고 17일만에 바로 2차 수술을 들어갔다가 몸 회복이 더딘 나를 보며, 엄마가 나를 보러 병원에 면회를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울었다.
계획한 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내 성격에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쓰는 나를 보고 신경쓰는 일들을 줄이라며, 신경쓰는 일들이 많아져서 엄마는 너가 다시 아프면 못 산다고 엄마는 울었다.
30살이 된 나는 엄마의 눈물꼭지다. 조금만 건드리면 터져버리는 꼭지. 수술 받으러 들어가기 전 성당에 가서 그런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저 엄마 옆에 오래 있어야 해요. 저 없으면 우리 엄마 어떡해요. 도와주세요."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그냥 이미 들어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도 좋을까.
41일간의 병원생활 후 집에 온지 1주일이 채 안되는 지금. 엄마는 내 기침 한번에 내가 더 아픈데가 없나 살피고, 콧물 한번 훌쩍임에 옷을 한벌 더 껴입게 하고, 따로 살고 있는 내가 밥은 얼마나 먹었는지가 궁금하고, 수술부위 통증을 살핀다.
엄마의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엄마의 챙김이 좋은 나는 30살이다.
아직도 엄마가 옆에 있어 좋은 30살. 나는 지금도 엄마가 참 좋다.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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