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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on Apr 06. 2021

여행의 마무리는 다음을 준비하는 것

해파랑길 도보 여행 (5)

  출근할 때는 기를 쓰고 용을 써야 겨우 떠지던 눈꺼풀이 쉬는 날이면 번쩍번쩍 잘도 떠진다. 숙소의 작은 창으로 내가 불을 켜고 잤나 싶을 정도의 햇빛이 쏟아졌다. 동해의 일출이란 역시 이런 맛이 있다. 창문을 열자 겨울의 신선함이 간밤의 무거움을 몰아냈다. 오늘은 새 아침이고 다시 걷기 시작이다. 왜 여기까지 와서 걸어야 하나, 걸음을 통해서 무얼 얻어가야 하나, 내 소중한 휴일이 그냥 걷다가 끝나도 될까?

생각도 잠시, 그런 고민 다 쓸모없다. 다시 길을 나선다. 아무튼 걷기다.


역광으로 찍은 일출


  해변길을 따라 걷는 코스답게 초반엔 동해안의 일출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실눈도 겨우 뜨게 만드는 해를 뚫자니 자동으로 고개가 숙여진다. 또 너무 해변 쪽으로 가다 보면 길이 아닌 곳도 나온다. 내가 이정표를 못 보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생각 없이 아무튼 직진! 하다 보면 바닷물로 직행. 어느 정도는 정신을 차리자. 약간의 주의만 기울여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이정표며, 방향 표시가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코스는 고래불 해변에서 후포항까지 가는 23코스. 오르막이 없어서 난이도가 낮다. 나처럼 해파랑길 완주를 결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코스를 추천한다. 길이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위험하지 않다. 긴 시간 걷다 보면 신체의 리듬 때문에 명상의 단계에 돌입하게 되는데 그럴 땐 아무래도 주의를 기울이기가 어렵다. 내 안으로 의식이 침잠하기에 다른 감각들은 반 OFF 상태가 된다. 이럴 때 사람들과 부딪히거나,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거나, 혹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큰일이다. 멍 때리다가 누가 나를 건드렸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서 상대방을 더 놀라게 만든 경험 다들 없나? 명상에는 작은 충돌도 큰 피해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 부분까지 생각했을 때 오늘의 코스는 딱 걷기 좋은 길이다. 물론 배불리 먹고 소화시킬 겸 "산책"하는 코스와는 다르다.


해풍을 막기위한 소나무 숲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당시 저 곳에 다녀온 지 1년도 더 넘은 시점이다. 글을 쓰면서도 오늘 한 일을 생각하고,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습관처럼 이곳저곳 의미 없는 곳에 클릭을 한다. 글을 쓰겠다고 해 놓고 뉴스 기사를 읽고, 메일함도 정리한다. 겨우 한 줄 쓰고는 다가올 이자 납입일과 카드 대금을 따져보고, 다음 문장을 생각하다 어느새 아침에 듣던 노래를 부른다.(물론 속으로..)


  책상에 앉아있는 한 시간 남짓 오만가지 생각을 했고, 어려 문장들이 스쳐갔다. 어느 것도 정리된 건 없고 완성한 문장도 없으며 심지어 노래 실력이 늘지도 않았다. 머릿속을 스쳐간 모든 것들은 잔상을 남긴다고 생각한다. 그 잔상들이 마치 노폐물처럼 느껴지면 퇴근할 시간이다. 사방이 꼭꼭 막힌 방처럼 피로하다. 시린 눈과 무거운 어깨, 뻐근한 허리 통증이 내가 여기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사진을 보면서 내가 걸은 길을 떠올려본다. 사진이라도 없었다면 자세히 기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걷다 보면 여러 문장과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노래가 재생되기도 한다. 이런 생각들은 그냥 지나갈 뿐이다.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산발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자리를 잡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어떤 생각은 휙 잡아채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다. 내 걸음이 어떤 생각은 흩어져 버리게 해 주고, 어떤 생각은 꼭 잡아주는 에너지가 된다. 또한 걸으면서 스친 생각들은 시원하게 환기가 된다. 마치 내 머릿속에 큰 창문이 달린 것처럼. 뭐든지 들어왔다 나가도 나는 상관없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눈 앞의 일들을 처리하고 하루하루 매시간 살아야 하다 보니, 마음 놓고 멍 때리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에너지를 순환시키고, 마음껏 내 세계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게 자유가 아니면 무엇일까. 나에게 일상 탈피란,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떨쳐낼 필요가 없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들을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는 시간이려나보다. 그렇다면, 이렇게나 멀리 떠나오지 않았어도 됐으려나.


 길이 지루해질 때쯤, 잠시 쉬어가기 위해 벤치에 앉았다. 낡은 벤치에 앉아 동해의 넓고 푸른 바다를 마주하니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떠나온 보람이 있다. 한 발짝 두 발짝 걸어온 동안 해가 중천에 떴고, 눈부심 없이 바다를 마주할 수 있었다. 몸도 노곤해져 눈을 감고 쉬려는데 늠름한 녀석이 말을 붙여왔다. 내려놓은 내 가방을 한참 킁킁대며 탐색하더니 이내 옆에 드러누웠다. 이틀 내내 혼자 지나다가 누가 다가오니 좋았다. 다시 길을 나설 때도 나와 함께 출발해준 너. 이제 그만 네 집으로 가라 말해도 아랑곳없이 걸으며 내가 잘 따라오나 감시하던 너. 처음 만난 곳보다 훨씬 먼 곳까지 동행해준 너. 반가웠다 요 녀석아. 건강하게 잘 있어라.


일출과 일몰을 다 봤다


  23코스의 종착지인 후포항에 도착해 첫 끼니를 먹고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몸은 힘들고 나른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일상의 to do list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여행을 했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다시 무수한 to do list가 추가된다. 누구보다 결의에 차서 결심하고 다짐한 나의 list.

  

  만족스러운 여행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돌아가는 길이 계획으로 가득하다. 다음 여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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