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청년으로 보낸 나의 20대
이번 달에 병원을 다녀왔다. 간수치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고, 화농성 한선염은 상태가 아직 좋은 편이다. 피부과에서는 간염때문에 이소티논을 받아오지 않았다. 류마티스 내과의 경우 간헐적인 어깨 통증과 아킬레스 통증이 있지만 이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염증 수치의 경우 ESR이 조금 오르기는 했으나 CRP는 괜찮았다. 그래서 이번에 3개월치 처방을 받았다. 올해 1월에 생물학적제제를 사용한 이후 처음으로 6개를 받았다. 약값+소화기내과 진료비+피검사비+피부과 진료비 등 해서 토탈 20만원 정도가 나왔다. 순수하게 약값만 보면 13만원정도 나온 것 같다. 산정특례가 아니었으면 130만원도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는데 산특 덕분에 살았다. 내가 받은 첫 번째 장기처방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장기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몸 상태가 좋았으면 좋겠다.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나는 유학을 꿈꿔왔지만 이루지 못했다. 2019년에 중국 유학을 한 번 다녀오기는 했지만 실패로 끝이났다. 코로나19가 2019년 12월 말부터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중국에 지속적으로 머물렀다고 하더라도 졸업은 어려웠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중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랩실에 있는 중국인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내가 여기서 터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교수와도 적지 않은 트러블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정말 좋지 못해어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잊지 못했다. 그런데 만으로 이제 30이 넘은 지금 나를 괴롭혀 온 것은 내가 꿈꿔온 것에 비해서 이뤄낸게 없다는 것이다. 나와 같이 석사를 시작하던 랩실 애들은 이미 석사를 졸업한 상태일거고, 일부는 박사로 진학을 했을 것이다. 당시 랩실 자체가 SCI 논문을 1년에 4-5개는 뽑던 곳이었기 때문에 스펙 하나는 끝내줄 것이다. 나는 중간에 나왔고, 지금까지 석사 학위 하나 따지 못한 상황이니 나이만 먹고 한게 없다.
상황이 이렇게 온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내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영국 대학원을 합격해 둔 상태였으니 떠나서 공부만 하면 얻을 수 있는게 석사 학위였다. 그러나 나는 2번이나 영국 대학원에 합격을 했으나 가지 못했다. 2023년에는 건선성 관절염을 진단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강직성 척추염 검사 및 몸상태가 악화되어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올해도 여름부터 조금 안좋아지더니 간수치 상승 및 자가면역간염 의심으로 입원 후 검사 일정이 잡혀서 가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10월이라도 출국하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나는 어떤 것을 시작할 때 중간에 끼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라 가뜩이나 친구 사귀는게 쉽지 않은데 중간에 꼄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두 번째는 내가 집안에서 돌봄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교 3학년, 4학년 때부터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전에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도 엄마가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트라우마가 나에게 있다. 그 뒤로 상태가 아주 심하지 않았는데 내가 대학교 3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쯤 급격하게 나빠졌다. 특히 4학년 때는 증세가 심해져서 내가 학업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와중에 졸업논문을 해야 했고, 당시 우리집에 돈이 없었으므로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라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름에 학교로 가서 실험을 진행하고, 인턴 원서를 써서 몇몇 기업들의 인적성 검사 및 면접을 보러 다녔다. 결론적으로 대기업에 지원한 서류는 다 떨어졌다. 엄마의 증세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그때뿐이었다. 이후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 번 발작이 일어났었다. 병원을 꾸준히 다녀서 약을 먹으면 이렇지 않은데 꼭 병원을 안가서 약을 중간에 중단을 해버리면 급성기가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는 집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직업도 어쩔 수 없이 재택근무로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다.
엄마는 단순히 어느 장기가 있거나 자가면역질환이 있거나 그런 상태가 아니다. 엄마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는데 증세가 심해지면 기분장애까지 생겨서 마치 조현병 환자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의사는 조현병으로 진단을 내렸고 어떤 의사는 아니라고 했다. 서울아산병원을 그동안 엄청 오래 다녔는데 원래 보시던 교수님은 엄마의 병이 조현병이 아닌 우울증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원래 보던 교수님이 은퇴를 하면서 다른 교수님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 교수님은 엄마를 조현병으로 진단하고 조현병과 관련된 약을 처방해주셨다. 이후 올해 의료 대란이 터지게 되면서 서울아산병원 측에서 더 이상 이 병원을 오지 말고 동네 병원으로 가라며 진료의뢰서를 써줬다. 거기에도 조현병이라고 입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갈 병원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다가 상태가 괜찮아서 별 문제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약을 좀 안먹고, 약한 약을 몇 달 먹었더니 다시 증세가 심해졌다. 사람의 기복이 매우 심하고 도저히 남의 말을 듣지가 않아 케어할 수가 없다. 정말로 정신질환 환자를 옆에서 도와주고 살피는 보호자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는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쫓겨난 이후 간 곳은 아산병원에 재직하던 교수님이 차린 개인병원이었다. 병원이 가정병원이어서 거리가 우리집하고 멀었다. 여기서 약을 처방받는데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갑자기 8월부터 심해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약이 안들었다. 그래서 다시 예약을 하고 가서 받았지만 똑같았다. 개인병원과 대학병원의 차이때문에 약 처방이 달라서 그런 것인지, 어쩐 것인지 이해가 안됐다. 결국 내가 삼성서울병원에 전화를 해서 예약 좀 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교수님으로 안내를 해줬는데 당장 상태가 심각해 교수 진료를 기다릴 수 없어 일반 전문의 선생님으로 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전문의 선생님이 아직 계셔서 다음날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전문의 선생님께서 실력이 좋아 바로 상태를 파악하셨고, 나이가 젊으신데 서울아산병원에서 진료를 본 것 보다 훨씬 나았다. 이 선생님한테 진료를 보니까 아산병원에서 본게 정말 성의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9월 추석때쯤에 정점을 찍었다가 9월 중순경쯤 다시 삼성병원을 가서 약을 추가한 뒤로 괜찮아졌다. 그때 선생님이 지금 상태가 지속될 경우 입원치료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입원을 하는 것은 환자도 힘들고 보호자도 힘들지 않냐며 가급적 약으로, 통원으로 해보자고 하셨다. 다행히 약 효과가 좋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병원을 가서는 약이 줄어들었고 현재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엄마의 병에 관해서는 나도 솔직히 증상만 봐서는 '조현병'인줄 알았다. 예전에 증세가 너무 심해서 아산병원 응급실도 가서 약을 처방받아오고 했었다. 근데 나름 그 과에서 권위자인 선생님이 아니라고 했고, 지금 다니는 삼성서울병원에서도 그쪽 약은 처방을 해주지 않았다. 우울증과 기분장애가 동반이 되면 조현병처럼 보일 수 있나보다. 새롭게 안 사실이다. 피검사를 통해서 뇌하수체 호르몬이나 다른 것도 검사를 했는데 별다른 이상이 나오지 않았다.
내 20대 인생에 영향을 끼친 것은 전자인 내 병보다는 엄마의 병이 더 많이 작용했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는 집에 상주하고 있을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내가 간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코로나가 터졌을 때는 아빠가 수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가 프리랜서를 하면서 돈을 벌었고 생계를 책임졌다. 내가 외국으로 나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이유는 한국에서 시달린게 많아 여기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큰 것도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간헐적으로 엄마의 병이 가끔 심해질 때가 있는데 그럴때면 정말 집을 떠나고 싶다. 그래도 나는 옆에서 간호를 하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이제는 내 삶을 살고 싶다.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솔직히 내 몸이 아픈건 괜찮은데 엄마가 아픈건 내가 남을 수밖에 없다. 집안에서 빠릿하게 뭔가를 결정하는 사람이 나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왜 나에게 이런 삶이 주어졌는지 비관적일 때도 많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이렇게 희생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내 20대는 이렇게 흘러가 버렸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좋은 삶이 펼쳐졌으면 좋겠다. 최소한 집안에 누군가가 아픈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