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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모 Nov 08. 2024

엄마의 여행전야

천방지축 얼렁뚱땅 우르르쾅쾅인 나를 신중하게 만드는 것

엔데믹 이후로 연휴와 휴가시즌마다 인천공항이 인산인해라고 한다. 뉴스 화면에 잡히는 인천공항은 흡사 김밥처럼 보일만큼 사람들로 빽빽하다.


나 역시 그 걸어다니는 김밥 중 하나이다.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미뤄뒀던 여행들을 하나씩 꺼내며 지난 여행의 흔적들을 발견했고 코로나가 터지기 전 몇 년간의 여행메이트가 그녀였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나와 그녀는 꽤나 가까운 모녀지간이다. 그녀와의 여행을 곱씹어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꽤 있었다.



그녀의 여행은 부산하다. 가기도 전부터 참 요란스럽다.

이때의 부산함과 요란스러움은, 보통 사람들이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들뜨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녀의 여행은 “이번 휴가 때 어디 갈까”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시작된다.



굳이 몇 달 전부터 표를 미리 끊은 것은 저렴한 비행기 표뿐만 아니라 넉넉한 준비 기간까지 함께 사기 위함이었건만. 무엇을 챙겨야 할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면세점에서는 무얼 살지, 어떤 옷을 입을지, 비상약은 어디까지 챙겨야 할지. 조 여사의 여행은 언제나 그 몇 달 전부터 이륙 직전상태이다.



필요한 물건들, 아껴두었던 옷들, 편한 신발들을 챙긴 다음에는 지나간 기억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여행에 대한 아주 소소한, 이른바 TMI를 주섬주섬 풀어놓기 시작한다. 마지막 여행이 몇 년 전이었는지, 신혼여행지는 어디였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행을 갈 때마다 어떤 물건을 꼭 사는지, 지난 투어의 가이드 인물이 어땠는지.



지극히 사소하여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들, 어딘가 모르게 약간의 과장이 섞인 듯한 이야기들. 그녀는 여행에 대한 그 대강의 기억들을 쉴새 없이 쏟아내며 여행을 맞을 준비를 한다. 한식이 최고라며 컵라면과 컵밥을 주섬주섬 챙기는 딸에게 타박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베테랑 여행자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게 두어달을 발이 땅으로부터 대략 5cm는 떠있는 채로 지내다 공항버스 짐 칸에 캐리어를 싣는 순간, 그녀의 기분은 절정에 치닫는다.




작고 귀여운 월급으로 밥벌이라는 것을 하게 된 후부터 한 여행의 태반은 줄곧 그녀와 함께했다. 그녀와의 첫 여행을 결심하게 된 마음은 심플했다. 비교적 이르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탓에 함께 여행을 갈 친구가 없었다. 그렇다고 용감하게 혼자 떠나기에는 나는 너무 겁쟁이였다. 만만한 동행자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녀였다.



주로 티켓은 내가 끊고 숙박비는 그녀가 낸다. 가서 사용할 경비는 각자 얼마간 환전을 한다. 따지고 보면 거의 비슷한 비용을 부담하고 가는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내게 "데려가 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루트와 동선, 번거로운 검색 몇 번 이외에 내가 조 여사보다 더 준비한 건은 딱히 없다. 아 물론 그녀와의 여행이 마냥 쉽다는 건 아니다(부모와의 여행은 생각보다 신경써야 할 디테일이 많더라) 

하지만, 오히려 여행자에게 필요한 기대와 설렘이라는 덕목은 그녀가 훨씬 더 많이 준비했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에 감탄했고 쉽게 감동했으며 깊이 빠져들었다.



때문에 "데려가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쑥스럽기도, 민망하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누군가가 먼저 가자고 말하거나 티켓을 내밀기 전에는 선뜻 길을 나설 수 없는 인생이었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늘 기다리지만 지나간 것을 곱씹는 것이 더 익숙했던 인생이기에.



코로나로 모든 것에 제약이 생겼던 시절동안 그녀는 마치 놀이공원에 가길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여행을 기다려왔다. 언제쯤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는거냐며 한숨을 쉬기도 했었다. 모두가 몇년 전의 그 재앙을 의식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을 즈음, 그녀는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조만간 다시 가게 될 그 여행에서도 그녀의 여행메이트는 나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메이트도 (가끔은) 내가 되길 바란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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