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동네... 사랑스러운 우리집

by Chong Sook Lee



온도가 갑자기 내려갔다. 오늘 아침 체감온도가 3도라고 한다. 며칠 전에는 30도까지 올라가서 여름이 온 줄 알았는데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침 일찍 동네 한 바퀴 걷는데 손이 시릴 정도로 춥다. 산불로 인한 연기로 공기의 질이 아주 나쁘다고 해서 집에 있을까 하다가 나왔는데 공기는 아주 맑고 날씨도 청명하다. 다행히 밤사이 바람이 다른 곳으로 불었는지 어제와는 딴판이다.


해마다 이맘때에 텃밭에 모종을 심어야 한다. 친구가 가져다준 모종들이 몇 개 있는데 이렇게 날씨가 추우면 모종이 얼어 죽기 십상이다. 해마다 5월 하순에 잊지 않고 눈이 와서 연휴를 지나고 모종을 심는데 올해는 날씨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몇 년 전에 5월 중순에 여행계획이 있어서 가기 전에 모종을 심고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재미있게 노는 사이에 눈이 와서 심어놓았던 모종이 모조리 다 얼어 죽었던 처참한 모습이 잊히지 않아 그 뒤로는 아무리 날이 좋아도 5월 중순 연휴 전에는 절대로 모종을 심지 않고 있다.


채소가 흔하지 않고 가격이 비싼 이곳에 사는 많은 교민들은 뜰에 텃밭을 만들고 더러는 온상을 만들어 채소를 길러 먹는다. 온상을 만드는 손재주도 없고, 농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우리는 남들이 주는 모종을 텃밭에 심고 물을 주며 나오는 채소를 길러 먹는다. 작년에는 친구가 가져다준 깻잎과 오이 모종이 잘 자라서 여름 내내 행복했다. 그리고 토마토모종은 가까운 가게에서 사다 심었는데 농사가 잘돼서 맛있게 먹었다. 고추는 몇 개 따먹지 못했고 상추도 시원치 않았는데, 부지런한 친구가 호박과 부추 그리고 마늘과 비트를 틈틈이 가져다주어서 고맙게 잘 먹었다.


지구 온난화로 이상 기온이라서 올해는 어떤 여름이 될지 모른다. 날씨 예보를 보는데 올해 역시 연휴 전 후에 온도가 많이 떨어진다는 소식이다. 자연이 하는 일을 알 수가 없으니 하루하루 자연의 눈치를 보며 농사를 짓고 산다. 봄을 기다리다 보면 제대로 된 봄은 만나지 못한 채 초여름을 만난다. 갑자기 찾아온 여름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계절은 잊힌다. 눈이 녹기를 기다렸던 잔디가 날씨 덕분에 푸르다고 좋아했는데 며칠 사이에 노란 민들레가 들판을 덮었다. 노란 민들레 들판이 참 예쁘다.


며칠 지나면 민들레꽃이 지고 홀씨가 사방으로 흩어져 하얗게 날아다닐 것이다. 자연은 어찌 그리도 정확하게 때를 아는지 신기하다. 요즘엔 아침 5시만 돼도 밝다. 낮이 길고 밤이 짧아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된다. 이민 온 첫해에 밤이 어둡지 않아 밝은 달을 보며 향수에 젖었던 생각이 난다. 동네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아주 조용하다. 걷는 사람도 없고, 자동차도 띄엄띄엄 오가고, 먹을 것을 찾으며 들판을 걸어 다니는 기러기 몇 마리가 있을 뿐이다.


학교를 돌아서 수영장을 지나 길을 건너 성당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번 주말에 오순절 기념행사를 한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해마다 하는 오순절 행사는 온 신자들이 같이 식사를 하고 음악을 틀어놓고 큰 축제를 한다. 형형색색의 리본이 바람에 날린다. 많은 봉사자들이 길을 막고 열심히 준비하느라 바쁘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본다. 우리 세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인데 세월 따라 여러 가지 변했지만 여전히 옛날 모습이 있어 정겹다.


손자들이 우리 집에 오면 잊지 않고 한 번씩 놀이터에 가서 노는 것을 보면 옛날에 아이들이 신나게 놀던 생각이 난다.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나고 이제는 손자들이 그 나이가 되었다. 34년 전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는 우리 아이들 또래 아이들이 엄청 많았었는데 그 아이들이 모두 자라 동네를 떠나서 동네가 조용하다. 이곳에 이사를 온 이유 중 하나가 학교가 가까워서 이다. 우리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학교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끼리 학교를 다닐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운동장을 지나오면서 추억에 잠겨본다.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이 바쁘게 산 것이 꿈만 같다. 이제는 한가하게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언제 그런 시간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우리의 젊은 시절은 아이들을 키우며 사라지고 노년에 접어들어 인생 후반전을 산다. 전반전은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는 천천히 인생을 음미할 때이다. 달고 맛있게 잘 익은 과일 같은 후반전을 잘 살아갈 일만 남았다. 운동장 옆에 있는 언덕을 오르니 길건너에 우리 집이 보인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식구를 건강하게 지켜준 고맙고 사랑스러운 우리 집이다. 남편과 나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집이지만 볼수록 정겹다. 이리 봐도 좋고, 저리 봐도 좋은 집을 향해 걷는 발걸음에 기쁨이 넘친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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