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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각형 1:1 비율을 얘기하지 않고선 영화 마미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루킹룸(looking room)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도 불안함을 느끼는 영화 속에서 감독은 과감하게 앞뒤 모두를 싹둑 잘라버렸다. 피사체 외에는 어느 안정감조차 컷에 남기지 않았다. 관객은 결국 온전히 감독의 의도만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사무실의 분위기보단 열쇠가 주렁주렁 달린 디안의 열쇠고리 펜을, 스티브의 스케이트보드를, 그리고 인물의 감정을 감상한다. 시야가 꽉 막히고, 불안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선택한 줄만 알았던 정사각형 프레임은 우리가 프레임에 익숙해질 무렵 붕괴된다. 놀랍게도 스티브에 의해서다. 정사각형이 영화에서 무너지는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스티브와 디안, 그리고 카일라가 조화롭게 살아가며 미래를 희망차게 꿈꾸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망쳐진 순간에서 디안이 상상하는 스티브의 미래. 비율이 넓어진 것은 희망차고, 행복한 순간일 때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영화에서 정사각형 프레임이 무너지는 것은 단 두 번뿐이다. 영화 마미는 계속해서 절망을 논한다.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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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는데, 자꾸만 죄가 쌓인다.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스티브의 죄목은 모두 디안의 몫이다. 스티브를 버린 것을 재상기하는 마지막 디안의 울음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안정적인 흐름을 타다가도 다시 급변하고, 또 가라앉는다. 사소한 것에도 불같이 달려드는 스티브와 함께 끝없이 오르내린다. 예측할 수 없는 액션, 호러의 장르가 아님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영화의 모든 것을 뒤흔드는 스티브가 조용하길 바라면서도, 멋대로 날뛰며 행복해주길 바란다. 꿈이 있는 스티브가 기특하지만, 카일라가 스티브의 목을 짓누를 때는 통쾌한 감정을 느낀다. 이런 양극화된 감정을 느꼈다면, 우린 이미 감독의 수에 넘어간 것이다. 팔을 양껏 펼치고 미소짓는 스티브의 얼굴이 나왔을 때부터 우리는 스티브에게 표현할 수 없는 연민과 애정을 느꼈다. 장애를 나무랄 수 없게 되었다. 사회의 법이란 틀에 스티브가 넘어 들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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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를 밉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디안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이은 취직 실패로 우는 디안에게 스티브는 눈물을 닦아주며 자신의 장애를 인정한다. 화를 줄이고, 대책을 찾겠다는 말을 한다. 엄마를 사랑하는 자식을 누가 비난하겠는가. 하지만 엄마를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자꾸만 죄로 쌓여 엄마에게 돌아온다. 이것을 누구의 탓이라고 하겠는가. 감독은 해결할 수 없는 불안을 관객에게 연이어 던진다. 인물들의 불안은 곧 관객의 몫이다. 정사각형의 비율처럼 다양한 것을 바라볼 수 없는 편협된 시선에서 스티브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버림받은 걸 안 후에도 스티브는 엄마를 향한 사랑을 접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난 널 더 사랑할 거야. 반대로 넌 날 덜 사랑하게 되겠지.’ 라는 디안의 대사는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디안을 향한 스티브의 사랑은 병적인 것이며, 이제 더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디안의 바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