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복사기 앞에서 펼쳐지는 잡담의 품격
“프린터가 또 멈췄나?”
작게 중얼거리며 복사기 앞으로 걸어간다.
그 옆에 누군가 먼저 와 있다.
보고서 출력 중.
잠깐 눈이 마주친다.
그 짧은 순간,
자연스럽게 말이 시작된다.
“어제 회의 진짜 길었죠.”
“점심 뭐 드셨어요?”
“아직도 그 자료 하세요?”
“야근했어요?”
“그 팀은 원래 그래요…”
내용은 없다.
하지만
“당신 혼자만 그런 건 아니에요.”
라는 말이 담겨 있다.
말이 시작되는 곳
사무실에서 말을 걸기 애매한 사람도
복사기 앞에선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된다.
업무도, 보고도, 경쟁도 아닌
그저 같은 공간을 쓰는 사람들로서.
“오늘따라 느리네요.”
“저 어제도 이 기계랑 싸웠어요.”
이런 짧은 말들이
기묘하게 웃음을 만든다.
대단한 유머도, 깊은 공감도 아니지만
딱 그만큼이
지친 마음에 여유를 남긴다.
복사기 앞 대화에는 속도가 없다
줄 서서 기다리는 1분.
종이가 출력되는 1분.
그 시간만큼은
다들 천천히 말한다.
목소리가 높지도 않고,
시선이 부담스럽지도 않다.
그저 '회사 생활'을 함께 견디는 동료로서.
잡담은 비생산적인 게 아니다
그 잡담이 있어야
업무도, 스트레스도,
사람 사이도 부드러워진다.
복사기 앞에서 나눈 말 한마디가
오늘의 기분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