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아니. 눈이 번쩍 하고 뜨였다. 온 방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이는 꼬마전구 불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오렌지를 먹어보기는커녕 실물을 본적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 귤빛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주리와 나는 이 불빛을 작은 불이라고 부르곤 했다. 어둠이 신천리 구동 부락 위로 스르르 내려앉으면 저 멀리서 환영처럼 전해오는 개 짖는 소리, 찌르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만이 밤의 적막을 채우곤 했다. 세 살 터울의 자매인 우리는 아직 어두움을 무서워하는 나이였다. 엄마는 잠자리에 들 때면 그런 우리를 위해 작은 불을 밝혀 주었다. 그리곤 성경에 나오는 옛된 이야기들을 마치 전래동화를 읊듯, 들려주곤 했다. 어른 엄지손가락 크기의 꼬마전구 불빛이 켜지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더 이상 이 불은 작은 불이 아니었다. 낡은 흙집의 아담한 안방 전체가 너른 엄마품이 된 것 마냥 마음속에 훈훈한 바람이 살랑였다.
그날도 모든 게 같았다. 꼬마전구 아래 엄마의 말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여느 때처럼 잠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천장엔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습관처럼 엄마의 숨소리와 엄마의 냄새를 찾았다. 어떤 기척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낡고 누런 흙벽에는 주리와 함께 그린 드레스 입은 공주가 씽긋 친근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익숙한 귤색 불빛 아래 엄마도, 아빠도, 주리도 없었다. 네댓 살의 생각으로는 퍽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왜 아무도 보이지 않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밖에 나가려면 옷을 입어야 한다.
혼자 옷 입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나이였다. 그래도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공주가 그려진 분홍색 내복만 입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않는 일이다.뺏간(서랍장)을 뒤져 내 옷처럼 보이는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집어 들었다. 허둥지둥 움직인 터라 그 옷이 내 옷인지 주리 옷인지 분간할 틈도 없었다. 그렇게 옷가지를 손에 든 채로 창호지 바른 빗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무 마루를 밟고 섰다. 뺨을 지나 내복 속까지도 서늘한 바람이 비집고 들어서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하늘엔 보름달이 빛났다. 어디로 가야 하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주리는 어디로 간 걸까?그래 선미 언니네 집사님이라면 알 거야.
앞이 막힌 살구색 쓰레빠를 단단히 신었다. 엄마가 읍내 시장에서 사준 쓰레빠는 그때 그 시절 우리에게 운동화였다. 언제 어디를 갈 때든 그 쓰레빠면 충분했다. 봄 언저리 엄마와 동네에 쑥을 캐러 갈 때도, 주리와 풀잎과 꽃잎을 그러모아 조막 돌로 짓이겨 소꿉놀이를 할 때도.
마을에 유일했던 공동우물인 샘골에 놀러 갈 때도.
늘 우리와 함께 했던 살구색 쓰레빠에 발을 꼭 맞춰 넣었다.
선미언니는 어릴 적 나와 자주 놀던 교회 언니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이름은 분명하게 기억하지만 아쉽게도 생김새는 희미하게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선미언니의 엄마는 우리 교회의 집사님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선미 언니네 집사님이라는, 어른이 듣기에는 다소 어색한 이름으로 그분을 부르곤 했다. 그 때문인지 희한하게도 선미 언니네 집사님의 이름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그분이 나를 향해 방긋 웃던 모습은 그 얼굴의 주름까지도 생생하다.
우리 집에서 선미 언니네 집까지는 300미터, 어른 걸음으로 5분 정도 되는 시골길이었다. 왼편에는 너른 논이, 오른편으로는 산비탈로 이어지는 고추 밭과 담배 밭이 있었다. 산비탈을 따라 오르면 밤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 숲에서 주은 밤은 유독 맛이 없었다. 지금은 세련된 아스콘포장길이지만, 당시만 해도 돌맹이가 발에 채이고 길가에는 잡초들이 무성히 돋은 비포장 흙길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에 어른거리는 풍경이지만, 그날 밤의 기억 속에는 그 길을 달음질쳤는지 조심스레 한 발씩을 옮겼는지 혹은 길을 걷다 넘어졌는지, 그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하는 기억이 없다. 그저 어느 순간 나는 선미 언니네 집사님 집 파란색 대문 앞에 서있었다.
대문은 육중하고 거대했다. 역시나 귤빛인 가로등 빛에 비친 대문의 색깔은 퍽 어두웠다. 평소와는 다르게 굳게 닫혀있던 대문에 나는 자못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그리곤 "집사님!", "선미 언니네 집사님!" 하고 목청껏 소리 높여 집사님을 애타게 불렀다. 달 빛 아래 풀벌레 소리만 낮게 울리는 밤의 정적이 깨어졌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날을 세운 채 짖어대는 시골개의 컹컹거림, 그리고 돌림노래를 부르 듯 동네 개들이 함께 짖어대는 소리. 불현듯 마음속이 캄캄해지며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의 기억은 그 자리에 멈춘다. 후에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전라도 시골교회의 젊은 목사부부였던 우리 부모님은 평일 저녁마다 예배모임이나 추도예배의 인도를 위해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일찍 잠이 든 것이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기가 옹색했던지 우리 부모님은 나를 두고 얼른 예배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안방에서 자고 있어야 할 첫째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엄마가 느꼈을 당혹스러움을 이해할 만하다.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가 나를 찾던 엄마는 선미 언니네 집사님 앞에 서있던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두 손에 한가득 옷가지를 든 채.
1990년 언저리 내가 만난 인생 첫 기억.
이 기억의 어디부터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고, 엄마의 이야기나 어릴 적 사진에 의해 각색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아마 모든 게 적절히 배합되어 내 기억 속에 영화 장면처럼 계속 재생되는 것일 테다.
그렇지만, 자다가 번뜩 눈을 떠 나 홀로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 순간 찾아온 긴장감과 당혹감. 그 생경함. 그 집 대문 앞에서 집사님을 애타게 불러대는 나에게 찾아온 어두운 마음은 달리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다.
반추해보면 내가 품은 깊은 두려움의 절반은 내 DNA에 새겨진 불안과 긴장이고, 나머지 2할쯤은 내 삶의 첫기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