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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니 Feb 07. 2022

부담을 느끼는 건 그냥 부모이기 때문이야

소소 35개월, 46개월

  “오늘 보니까 소소가 00도 하고 00도 하고 00라고 말도 하더라. 소소는 아무 문제없어. 정말 잘 크고 있다.”

  “아니야, 엄마.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애들도 00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오늘도 친정엄마와의 대화는 '소소가 문제없다-문제 있을 수도 있다’의 돌림노래가 되었다. 노래가 몇 바퀴를 돌고 나자 결국 친정엄마가 역정을 내셨다. “아니, 도대체 그래서 너는 어쩌자는 거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래, 대체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고 자리를 피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거실에서는 소소와 아빠가 치카치카로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누웠는데 마음이 뒤숭숭했다. 친정엄마가 말씀하신 게 다 사실인데, 소소가 오늘 성숙한 말과 행동을 한 것도 맞는데, 나는 그걸 다 부정하려고 하네. 할머니가 걱정하고 내가 우리 애 괜찮은데 왜 그러시냐며 항변해야 할 거 같은데 입장이 뒤바뀐 거 아닌가. 엄마인 내가 굳이 아이의 부족한 부분에만 집중하려는 이유가 뭘까. 이유를 꼭 알고 싶어서 골똘히 생각하다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답을 찾았다. 나는 결과를 책임지는 게 두려웠던 거다.



  최근 「당신의 아이는 잘못이 없다」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는 아동을 2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성이 낮고 환경에 좌지우지되지 않아 어디서나 씩씩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아이'와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잘 가꾸면 누구보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잘못 키우면 시들어버리는 '난초 아이'가 그것이다. 연구진은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아이들이 자주 아프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떠나 유치원 입학이라는 역경에 도달했을 때의 스트레스’를 측정했는데 놀랍게도 예측 가능하고 일관성 있으며 아이를 지지해주는 가정에서 사는 난초 아이들이 연구에 참여한 모든 아동 중에서 가장 덜 아팠다. 난초 아이는 소속된 가족의 사회·감정적 상태에 따라 또래 중 가장 아프거나 가장 건강한 아이가 된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책을 덮고 나니 온몸이 뜨거운 사명감으로 불타오르는 걸 느꼈다. 부모가 역할만 제대로 해준다면 소소는 누구보다 아름답게 꽃을 피울 수 있어! 며칠간 퇴근한 남편 뒤를 따라다니며 소소에게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지를 지겨우리만큼 설명했다. 제대로 부모 역할을 해내겠다는 각오와 함께 꽃이 만개한 난초를 꿈꿨다. 이때는 아는 것이 힘이 되었다.


  그러다 몸 컨디션이 나빠지고 기분이 다운되자 나는 아마도 난초 아이의 반대쪽 가능성에 주목한 모양이다. 갈수록 ‘예측 가능하고 일관성 있으며 아이를 지지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해졌고 나 때문에 난초가 시들어버릴까 봐 두려워졌다. 그래서 엄마의 책임 회피를 위해 소소에게 ‘원래 문제가 있는 아이’라는 명찰을 달아주려 했던 거다.


  진실을 알고는 소름이 끼쳤다. 자신의 면피를 위해 아이에게 낙인을 찍으려 애쓰는 엄마라니. 마치 범죄를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난이 두려워 차마 남편에게도 내색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결국 언니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언니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대번에 그럴 수 있다고, 자기도 그렇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어, 그건 마치 부모의 본성 같은 거라고 생각해. 부모 자신을 위한 방패이자 아이를 위한 변호랄까.

  나도 하나가 이민자의 아이라는 걸 항상 강조하는 걸. 애한테도 강조하고, 주변 사람들한테도 강조하고. 옆집 크리스 엄마도 똑같아. 애가 그렇게 뛰어나고 훌륭하게 컸는데도 성소수자의 아이라는 걸 얼마나 강조하는데. 하나 친구 노아 엄마 있잖아. 노아 엄마는 노아가 학교에서 매일 말썽 피우는 걸 키가 작아서 그렇다고 계속 말해. 키 때문에 열등감이 있어서 행동이 부정적으로 나오는 거라고.

  부모라서 주어지는 엄청난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잖아. 그걸 느끼는 건 그냥 네가 부모이기 때문이야.”


  당연하다는 듯한 언니의 말이 다행스럽기보다 충격적이었다. 부모라서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자신의 아이를 미리 한계 짓는 마음을?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부모가 육아를 부담스러워해도 되는 건가? 그렇지만 내가 한 짓은 크리스나 노아 엄마보다 훨씬 나쁜 것 같은 걸. 결국 언니의 말을 다는 납득하지 못했다. 다만 말을 전할 때 언니의 말투가 유쾌했던 걸로 보아 일이 내 생각만큼 심각하진 않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2022.02.04

  그때로부터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오늘 엄마가 딸에게 쓴 편지 형식의 에세이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읽다가 마음을 잡아채는 구절을 만났다. 막내가 학교 앞에 파는 눈곱 끼고 설사하는 병아리를 사 왔는데 말을 걸며 놀아주고 정성껏 돌보았더니 며칠 후 병아리 병을 이겨냈다는 일화의 다음 부분이었다. 달라진 건 막내의 관심과 사랑뿐이었는데 다 죽어가던 병아리가 살아나는 것을 본 작가의 솔직한 심정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다가 사실을 말하자면, 소름이 돋았어. 세상 모든 생명, 집에서 키우는 화분에게조차, 이제는 저 병든 병아리에게조차 사랑과 관심이라는 게 저렇게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단 말이야. (중략) 미안하게도 엄마는 갑자기 너희들이 더 버거워졌다. 사랑이란 게, 사랑이란 게, 맙소사! 싶었어. 누군가를 향해, ‘내가 뭐 어쨌다구요? 애들이 공부 못하는 거, 애들이 방황하는 거 그게 뭐 다 내 탓이냐구요?’ 공연히 변명해야 할 것 같았단다.

- 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중에서

  

  위대한 사랑의 힘을 목도했으니 으레 아이를 더 사랑하겠다는 엄마의 맹세가 등장할 차례라 생각했건만. 대신 작가는 ‘소름이 돋았다’며 ‘미안하게도 엄마는 갑자기 너희들이 더 버거워졌다’라고 고백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한참 동안 멍해져 있었다.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자 부담을 느껴버린 나같은 사람이 또 있! 심지어 그런 마음을 끄럽게 여기지 않고 책으로 써서 만천하에 공개했다니!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그래도 되는 거였어. 그 순간 언니와 나눴던, 납득하지 못했던 대화가 떠올라 부리나케 예전 글을 열었다. 당시 기록까지 했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이 이번에는 쏟아지듯 와닿았다. ‘그걸 느끼는 건 그냥 네가 부모이기 때문이야’


  책과 모니터 화면을 번갈아가며 읽고 또 읽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아이 탓을 해버렸다며 죄책감에 잠 못 이루던, 스스로를 끔찍하다 생각했던 초보 엄마를 떠올리며. 바로 어제까지도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를 향한 감정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촘촘히 사랑이어야 하는 줄 알았던. 그 처음과 끝 사이의 수많은 점들에 엄청난 책임과 부담이 존재함을, 부모이기 전에 인간이므로 그 감정에 어깨가 짓눌리고 숨이 막힐 수 있음을 몰랐다. 그래도 되는지 몰랐다.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을 것 같던 마음과 그 마음을 품었던 나를 오늘에야 이해한다. 다들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인 걸. 두려워서 피하고 싶을 수도 있어. 버겁다고 말해도 괜찮아. 그걸 느끼는 건 그냥 내가 부모이기 때문이니까. 내가 엄마로 살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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