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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an 21. 2024

벌레를 무서워하는 아내와 그녀가 순례를 떠난 해

신혼여행 36일 차에 느낀 아내의 변화

까미노 데 산티아고 29일 차 일정표 


아내는 벌레를 무서워한다. 벌레를 피하려다 팔을 부딪혀 다치는 아내를 보면 빈대 잡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한 뒤 아내의 가장 큰 걱정 중 하나는 바로 벌레였다. 여행 시작 전부터 산길을 걷다 만날 벌레 생각에 발작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그럼에도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는데, 벌레에 대한 무서움도 자주 겪다 보면 결국 극복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혼여행 36일 차, 산티아고 길을 걸은 지는 29일 차가 되는 날이다. 이미 들길, 산길, 바닷길 숱하게 걸은 지도 한 달이 되어가는 시점이다. 그간 무수히 많은 벌레가 옷 속으로, 입 속으로, 콧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이쯤 되면 아내도 벌레에 무감각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큰 착각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mm 단위의 날벌레에도 허리나 목이 삐끗할 만큼 격하게 움찔했고, 5kg이나 되는 가방을 메고도 줄행랑치기 일쑤였다.


지나치게 벌레를 무서워 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하는 아내가 안타깝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내가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했다는 사실이다. 한 달이나 이 길을 걸었는데, 왜 자신은 변한 것이 없는지 속상해 했다. 겨우 벌레에 대한 무서움 하나 극복하지 못했는데, 이 길을 걸으며 무엇을 얻겠느냐고 스스로를 원망했다.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신기하리만치 벌레를 계속 무서워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변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생각할수록 아내한테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 주제를 돌려,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닌 가진 것을 살펴보기로 했다.




첫 째, 체력이 놀랍도록 늘었다. 

약 2년 전, 아내와 자전거를 탔다가 길바닥에 널브러졌던 아내가 기억난다. 수십 km를 달린 게 아니다. 여름에 따릉이를 타고 바람을 쐬러 갔을 뿐인데 바닥을 치는 체력과 여름의 더위에 어지러움을 느껴 길바닥에 앉아 안정을 취했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당시에는 응급차를 부를지 고민할 정도로 심각했다. 물론 그 이후로 주기적인 운동을 했지만, 여전히 체력이 좋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시작한 초기에도 길을 걷고 새로운 숙소에 도착하면 거의 탈진 상태로, 한숨 자고 나서야 겨우 식사를 하러 나갈 수 있었다. 아침에는 피곤함으로 인해 극도로 기분이 좋지 않았고, 저녁에는 산책을 하자는(물론 20~30km를 걷고 난 후이긴 했지만) 나에게 화도 자주 냈었다.


하지만 한 달 가량이 지난 지금, 아내는 몰라보게 바뀌었다. 길을 다 걷고 숙소에 도착한 뒤 곧바로 식사를 하러 나갈 수도 있으며, 저녁에 밥을 먹고 먼저 마을 산책을 하자고 제안한다. 아침에도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다. 오르막길도 (물론 약간의 거친 말이 나오긴 하지만) 성큼성큼 잘 오른다. 산길임에도 벌레를 피해 날쌔게 도망 다니는 것이 좋아진 체력의 반증일 것이다.


별 것 아닌 사소한 행동들이지만, 그 이면에 숨은 체력 증진은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번 여행의 제1 목적이 체력 증진인 만큼,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산티아고 길을 걷는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따릉이를 타다 탈진했던 아내와 5kg 가방을 메고도 쌩쌩하게 걷는 아내


둘 째, 호기심이 늘었다.

아내는 호기심이 많은 타입은 아니다. 무던한 성격인데, 가끔은 지나치게 무심한 경우도 많다. 반면 나는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성격이라 거의 모든 것에 ‘왜 그럴까?’를 묻는다.


여행 초기에는 많은 경우 내가 ‘스페인 사람들은 어떻게 낮부터 맥주를 많이 마실까?’, ‘왜 여기 청소년들은 산티아고 길의 노란 화살표를 지우거나 가짜 화살표를 만들어 헷갈리게 하지 않을까?’ 같은 궁금증을 쉴 새 없이 늘어놓으면 아내의 반응은 ‘몰라’, 혹은 ‘그러게’ 정도였다. 그마저도 대답을 하는 경우에는.


하지만 지금은 아내의 여행 노트에 이런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산티아고 의문 도감 섹션’. 여기엔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키울까?’, ‘산티아고 길 위의 마을 사람들은 무엇으로 먹고살까?’, ‘자꾸 보이는 저 건물의 용도는 무엇일까?’ 등의 궁금증이 담겨있다.


호기심이 많은 것이 꼭 좋은 것 많은 아니지만, 이런 궁금증이 늘어날수록 여행의 재미가 늘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아내의 산티아고 의문 도감



셋 째, 적극성(혹은 호전성)

아내에겐 내면으로 파고드는 성향이 있는데, 말다툼을 할 때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느 정도 언쟁이 오가다 화가 나면 입을 꾹 닫는다. 그리곤 저만치 앞서 가거나 자리를 피한다.  싸움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날 선 대화가 오가는 상황 자체를 불편하게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산티아고 길의 무엇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몰라도 이제 아내는 화가 나도 입을 닫지 않는다. 오히려 청산유수로 나의 잘못을 지적하고 혼을 낸다. 어떻게 보면 언변이 늘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젠 좀 더 속 시원히 싸우고 화해한다.




이렇게 아내의 달라진 점을 하나씩 이야기하다 보니,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꽤 큰 변화가 보였다. 상심하던 아내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은 듯했다. 

벌레에 대한 무서움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더 들지도, 혹은 영영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분명 새롭게 얻는 것이 있다. 


앞으로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은 떨쳐내고, 우리가 가진 것, 얻는 것을 찬찬히 기록하고 살펴보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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