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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an 28. 2024

인터넷 안 되는 산티아고 숙소에서 반강제 도파민 디톡스

80일간의 신혼여행 - 43화

산티아고 순례길 일정표 - 33일 차


어느덧 산티아고 길을 걸은 지 33일 차가 되었고, 걸어온 길만 600km가 넘었다. 최종 도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4일밖에 남지 않은 지점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인터넷이 (거의) 안 되는 숙소를 만났다. 와이파이가 없고, 현지 통신사 인터넷도 장소에 따라 아주 느린 속도로만 연결이 되었다. 그나마도 침대에서는 연결이 계속 끊겼다.

생각해 보면 이제야 이런 숙소를 만나는 게 더 신기할 정도다. 7년 전과 5년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이런 숙소가 어렵지 않게 보였는데. 새삼 산티아고 길에도 통신 환경이 많이 좋아졌구나 싶었다. 뭐 어찌됐건 인터넷이 안 되는 환경을 오랜만에 만나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오늘은 평소보다 짧게 14km가량을 걸어 일찍 숙소에 도착했기 때문에 여유 시간이 많았다. 숙소에 딸린 식당에서 여유롭게 점심 식사를 했고, 최근에 만난 일본인 순례자 두 명을 비롯해 (북쪽길에 와서 몇일만에 처음 만나는 아시아인이었다.) 길에서 몇 번 스쳐간 얼굴들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에도 시간은 아직 이른 오후였다.

숙소로 돌아와 빨래를 돌리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켰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인터넷이 안 된다는 것을. 와이파이가 없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지만 통신사 인터넷까지 안 될 줄이야. 2층 침대의 아래에 누워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위쪽을 아내를 찾았다.

“여보 핸드폰도 인터넷 안 돼?”

3g는 잡히는데, 네이버 메인창이 뜨는 데에도 한참을 기다려야 해서 도저히 쓸 수 없다고 했다.

침대에 누워서 인터넷을 할 수 없었다.

침대에서 누워서 유튜브를 보다 낮잠을 자는 것.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일인데, 그걸 못 하다니! 

애석한 마음을 뒤로하고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그냥 낮잠을 잘 까 싶기도 했지만, 침대에 누우니 눈은 멀뚱멀뚱, 하필 오늘은 별로 걷지도 않아 잠도 잘 안 왔다. 그렇게 가방을 뒤적였다. 책이 눈에 띄었다. 얼마 전 아내와 같이 샀던 책이었다.



사실 우리는 얼마 전에 한 가지 결심을 했었는데, 바로 쇼츠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휴식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결심이었는데, 쇼츠를 보면 온라인에서 지나치게 허우적대며 현실감각이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츠를 끊겠다는 결심과 함께 그 대신 책을 읽자며 샀던 책이다.

실제로 그 결심 이후로 쇼츠를 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책은 몇 페이지 읽히지 않고 배낭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쇼츠의 빈자리는 책이 아니라 인터넷 뉴스와 긴 영상이 대신했다. (도긴개긴이지만, 뭐 쇼츠보다는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다.) 그러다 오늘, 인터넷이 안 되는 날을 맞이한 것이다. 


침대에 누워 새것 같은 책을 펼쳐 들었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졌다. 우리의 침대는 창가였는데, 마침 얼마 전부터 우박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타닥타닥, 서늘한 기운이 들어 침낭에 몸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날은 어둑했지만 책을 읽기에는 충분한 빛이 들었다. 

이층 침대가 열댓 개는 늘어져 있는 넓은 방 안에는 우리 부부를 제외하곤 이미 낮잠을 자고 있는 사람 두 명 밖에 없었다. 코 고는 소리와 빗소리, 그리고 알베르게의 평온함에 기분이 나른해졌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책을 열심히 읽지는 못했다. 글을 몇 자 읽다가 멍하니 창 밖을 보기도 하고, 사소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책에 눈을 돌리고, 다시 창 밖을 보길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리곤 어느샌가 잠에 들었다.

창 밖으로 내리는 비

잠에서 깼을 때는 비가 그쳤다. 날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이층 침대 위에서도 아내가 부스럭 대는 소리가 들렸다. 낮잠을 안 자고 책을 계속 읽고 있는 건지, 아님 잠에서 깬 건지, 그것도 아님 잠을 자며 몸을 뒤척이는 것인지.

무엇이 되었든 나도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 더 누워 있기로 했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여전히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반 강제로라도 멍하니 있을 수 있게 되어서. 다시 책을 집어 들고 창밖과 글자를 천천히 번갈아가며 들여다봤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아내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밥 먹으러 가자.




식당에 앉아 밥을 기다리는 동안 침대에서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도 책을 보다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이 되지 않는 상황이 좋았다는 것이었다. 핸드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타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니, 서글프기도 했지만 동시에 좋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하고 남은 시간은 휴게실에 앉아 아내와 이야기를 하고 마저 책을 읽으며 보냈다. 핸드폰과 인터넷에서 멀어져 한가롭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이 감각이 소중했다.

최애 네스퀵을 타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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