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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Feb 11. 2024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에 드는 생각들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에서 끝나는…

나의 세 번째 산티아고이자 아내와 함께 걸은 이 길이 이제는 19km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두니 뭔 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물론 전에 와 본 곳이니 데자뷔가 아니라 실제 기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기시감은 장소가 아닌 감정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산티아고를 다 걷고 나서 느껴지는 소회에서 묘한 동질감과 이질감이 함께 존재하는 느낌.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의 단상이 이어 맞춰진 건 식당에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였다.


산티아고 순례길 북쪽길


오늘은 비교적 짧은 거리인 19km를 걸어 Pedrozo(뻬드로우조)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앞서 적었듯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9km를 남겨둔 곳이다. 이곳을 마지막 마을로 정한 데에는 나의 경험이 작용했다. 5년 전 산티아고 길을 걸었을 때 4km를 남겨둔 곳에서 마지막 날을 보냈었는데, 다음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4km를 걷는 길이 너무나 짧고 허무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소보다 일찍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숙소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다음 날 길을 걸을 때 먹을 음료와 간식을 사고, 낮잠을 자고, 7시 즈음 저녁을 먹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얼마 전부터 길 위에, 그리고 마을에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엔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얼마 전부터 북쪽길과 프랑스길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길에는 수많은 루트가 존재하는데, 프랑스길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걷는 대표적인 루트이다. 나 역시도 이전 두 번의 산티아고 길을 프랑스길로 걸었고, 이번에 아내와 함께 걸으면서도 프랑스길로 시작을 했다.


프랑스길은 대중적인 만큼 볼거리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만, 그런 만큼 많은 사람들이 걷는다. 그런데 2023년 5월의 프랑스길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길을 걷는 내내 숙소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그래서 우리는 북쪽길로 옮겨 걷기 시작했다. 북쪽길은 스페인 북쪽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길로, 시설이 조금 부족하고 지형이 험해 힘들지만,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지역이 많고, 무엇보다 사람이 프랑스길의 10분의 1도 안된다. 

한적한 북쪽길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39Km 남겨둔 Arzua(아르주아)라는 마을에서  프랑스길과 합쳐진다. 바로 그 마을부터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이유는 인증서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100km 이상 걸은 사람부터 인증서를 발급하기 때문에 마지막 100km 구간은 사람이 북적인다. 프랑스길의 Sarria(사리아)라는 마을에서부터 많이 걷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기업이나 단체에서 함께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걷는 사람들 등 그간 못 보던 사람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마을에 사람이 넘쳐났는데, 재밌는 것은 새롭게 유입된 사람이 많은 만큼 그 이전부터 길을 걸으며 얼굴을 익힌 사람들을 마주치면 유달리 반갑다는 점이다. 


마을에 꽉 찬 사람들을 구경하며 식당으로 향하던 중 눈에 익은 여행자를 만났다. 북쪽길을 걸으면서 알게 된 여행자인데, 걷는 속도가 비슷해 길에서 가끔 마주쳤고, 그때마다 간단히 인사만 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오랜만에 만나니 몇 년 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냥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간 잘 지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이제 마지막인데 기분이 어떤지 등등… 일종의 동지의식 같은 것 아닐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지고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벌써 앉아 있었는데,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흥분감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복잡한 감정의 공기가 흘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도 마지막을 앞둔 소회를 나눴다.


서로가 길을 걸으며 느낀 점, 처음 걷는 아내의 감정과 세 번째 걷는 나의 감정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내게 든 기시감의 정체와 내가 산티아고 길을 계속 오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되었다. 


식당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마지막을 앞둔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다.


솔직한 심정을 밝히자면, 지난 두 번의 산티아고 길에서 도착하는 날이 즐겁거나 감동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별 감흥은 없었고, 오히려 약간의 우울감이 있었을 뿐이다. 


물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많다. 길의 ‘끝’에 도달했다는 성취감과 그간의 고생이 떠오르며 생긴 감동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니 그 이유는, 내게 산티아고는 장소가 아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걸은 산티아고 길에는 시작 지점과 끝 지점이 없고, 메 ‘순간’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같이 걷는 사람과 스쳐 지나가는 다른 순례자들과 마을 주민들, 길을 걸으며 사귄 친구들, 혹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혼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상징하는 것은 그 ‘순간’의 끝이었기 때문에 우울했던 것 아닐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하루를 남겨둔 지금도 그런 우울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려 한다. 내가 느낀 그 기시감은 바로 이 아쉬운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라는 것이다. 비록 산티아고 길은 끝이 나지만 우리가 함께 여행하고 생활할 시간은 계속될 것이므로, 아쉽지만 슬픈 마음은 들지 않는다. 


산티아고 길의 끝을 하루 앞둔 이 밤은 해냈다는 흥분감과 끝났다는 우울감, 아내와 함께 한다는 안도가 복잡하게 섞인 묘한 감정으로 저물었다.


식당의 테이블 시트에 산티아고 지도가 그려져 있다. 마지막 마을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정말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기지개를 켜는데, 내 팔과 목에 붉은 반점이 보였다. 

가려웠다. 

설마…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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