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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타스 Dec 12. 2019

[공황장애] 공황이 왔을 때, 매뉴얼. (따라 읽기)

이 글이 당신의 위안이 되길.


1. 지금 당장 공황발작이 온 상태인 당신. 일단 머릿속의 생각을 비우세요. 불안하면 원래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요. 생각을 아예 하질 마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지 않아요. 당신도 그걸 알 거예요. 죽을 것 같은 ‘느낌’인 거고 지나가는 일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이 발작은 5분, 길어야 15분입니다.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어요. 15분을 넘긴다고 죽는 병으로 진화하지 않아요.)

시간에 연연하지 마세요. 생체시계랑, 사람들이 보는 시계랑은 달라요. 당신의 몸이 당신이 안전함을 받아들여줄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2. 손에 땀이 많이 날 거예요. 가만히 닦아주세요. 안절부절 못 하며 발을 동동 구르지 마시고, 몸에 힘을 전부 풀어주세요.

긴장하면 근육이 많이 뭉쳐요. 공황발작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그거 풀어주느라 고생합니다. 몸의 긴장을 풀어야 마음의 긴장도 풀 수 있어요.

서 있든, 앉아있든, 누워있든. 당신의 몸은 흐물흐물 연체동물이 됩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그건 이 상황에 신경 쓰지 마시고요.


3. 공황을 대상화해봅니다. 이 새낀 나한테 왜 왔을까요? 죽여버릴까, 그냥. 마음속으로나마 패 봅니다. 퍽퍽. 욕도 해보고. 공황은 관종이에요. 관심을 주면 커져요. 관심이라 함은, 공황에 대한 두려움, 불안, 염려 등입니다. 공황의 주식이죠. 먹고 엄청 튼튼해지고 커집니다. 나중엔 내 이성과 안정을 눌러버리는 나쁜 자식. 관심을 끄세요. 불안한 관심은 끄되, 주먹으로 욕하고 패는 이미지를 그려보세요. 그럼 점점 작아져요. 나보다 열 배는 커서 날 집어삼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쫄보더라고요. 내가 욕하면 울고, 때리면 쭈글거리는.


4. 이제 병 주고 약주고를 해봅니다. 공황아 공황아 때려서 미안하구나. 너도 내 감정, 또는 신체 시스템의 한 부분인데. 날 지키려고 네가 발동된 것인데 내가 너를 부정하고 미워해서 미안하구나. 약간 내가 사이코패스 같지만 계속해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황이란 놈이 원래 양날의 검이잖아요. 내가 빨리 위험에서 도망가도록 발작을 발동시키는 의도를 가지고는 있으나, 시도 때도 없이 넌씨눈처럼 발동시켜서 문제인 놈. 이면이 있으니까요. 그럼 나도 똑같이 해줘야지 뭐. 달래면 또 줄어듭니다. 점점 작아져요. 내 열 배는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젠 내 10분의 1도 안 되는 거 같아져요.


5. 그럼 얘가 왜 왔을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위험할 때 나타나는 반응인데, 그럼 내가 위험하다는 거잖아. 왜 위험해졌을까, 내가. 아. 아마도 극심한 불안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승진에 대한 부담, 생계에 대한 걱정, 혹은 인간관계에 대한 염려 같은 거요. 이런 게 쌓이다 못해 일정 수치가 지나서 내가 위험한 수준까지 온 게 아니겠어요. 스스로를 가학적으로 대했네. 내가 나한테 잘못했네. 나한테 미안해하세요.


6. 그리고 나를 꼭, 안아줍니다(사실 이건 집에서나 할 수 있는 거긴 한데, 밖에서도 가능하다면 철판 깔고 해 주시길 바랍니다). 두 팔을 벌려서 내 몸뚱이를 감싸 안고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사랑한다고도 말합니다. 너 힘들었구나. 나를 타자처럼 바라보고 말해주어요. 그리고 계속 쓰다듬으면서 말을 걸어요(사람들이 쳐다보긴 하겠네요). 어느 부분이 제일 힘들었어? 왜 그렇게 불안했어? 뭐가 널 염려하게 만들었어?


7. 토닥토닥해주어서 이제 진정이 되셨다면, 이성적인 인지교육을 스스로 해 줄 차례입니다. 걱정, 염려, 불안 이 모든 것들은 내 생활을 망쳤으면 망쳤지 더 나아지게 해주진 못합니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도 안 될 수도 있는 판국에, 잘 안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뭐하러 하냐고 스스로를 가르쳐주세요. 사람이나 세상이나 내 생각대로 되는 거였다면 난 이미 억만장자가 되었을 텐데, 억만은 무슨 천원도 굴러들어 오지 않을 걱정 습관을 왜 나는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봅니다. 걱정이 아니라 고민을.


8. 그리고 멍 때리세요 멍 멍 멍. 공황발작이 한창 심할 시절에는 잠을 자고 일어난 때가 가장 상쾌했어요. 그 이유는 잠을 잘 때는 생각을 안 하니까. 불안할 일이 딱히 없으니까. 그리고 일어나서부터가 곤욕이었죠. 계속 불안하고 무서우니까. 생각들이 머리를 지배하고 집어삼키는 듯해서 약을 많이 먹었는데, 이제 멍도 잘 때려요. 왜, 크러쉬였나, 어떤 가수분이 멍 때리기 대회 1등 했다는 소문 듣고 부러웠거든요. 생산적이지 않은 생각 집어치우고, 다 내려놓는 순간 오히려 풍성해지는 그, 오묘한 기분.


9. 이제 좀 괜찮으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오늘 밤 주무시기 전에도 멍 때리시고, 스트레칭하시고, 불안이 몰려들면 박수 한번 짝 치고. 잠이 너무 안 오면 차라리 웃긴 거 많이 보시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게임도 좋아요(전 카카오 사천성 좋아해요). 그래도 자기 전에 스마트폰은 좋지는 않으니 적당히 하시고요.


10. 이겨내느라 고생하셨어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본인이 알고 제가 아니까 둘은 확실히 알아요. 지하철을 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 계단을 내려가야 했던 순간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등등. 그래도 우리 처연해하진 말아요. 어차피 오래 날 집어삼킬 놈이 아니니까.


말이 길어졌어요.

행복만으로 사람이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 좋은 게 좋더라고요. 힘든 게 좋지는 않더라고요. 그러니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꿈 꾸세요. 다시 한번 고생하셨어요.



인스타그램 만화 -> http://instagram.com/record_of_panic_dis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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