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에 넘치는 용기

어쩌다, 식집사

by ACEV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삶을 가진 것. 코로나 시기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마스크 없이도 언제든 가까이 갈 수 있는 식물과의 동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아있는 것이란 바이러스의 공포에 떠는 생명체 단 하나뿐인 공허한 공간을, 다른 ‘생’이 있는 것으로 채우고자 하는 단순한 목적이었다. 전 세계를 죽음의 늪에 빠지게 한 전염병으로 인해 삶을 강제로 종료 당한 것도 억울할 일인데, 그 삶마저도 어느 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 대신에 1이라는 숫자로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바뀌는 건 상황이 아닌 매체에서 들려주는 늘어가는 죽음의 숫자뿐이었던 당시에, ‘생’으로 가득 찬 공간을 만드는 것은 언제든지 공포에서 도망칠 수 있는 작은 ‘방공호’를 만드는 것과 같았다.


커다란 신전의 정원이 있었음에도 파피루스 꽃이 심어진 작은 화분들 사이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는 람세스 3세의 삶을 지향하며 식물을 하나둘 들였다. 좁은 공간이라 그처럼 화분 사이를 오갈 수는 없었지만, 대신 매주 제각기 다른 모양의 화분 위치를 바꾸면서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한 기분으로 작품을 감상했다. 그렇게 매일 기쁨을 주던 초록의 생생하고 평화로웠던 공간이 갑자기 바깥세상과 다를 바 없는 좌절과 죽음의 공간으로 바뀐 것은, 방공호를 건설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때였다.


잎맥의 선이 아름답고 방패와 같은 모양이 마음에 들어 제일 잘 보이는 위치에 두었던 프라이덱이 점점 고개를 숙이더니 하루아침에 죽어버렸다. 그 옆을 지키던 새파랗고 매끈한 세라믹 화분에 있던 코로키아도 상태가 심각했다. 마티스나 샤갈의 그림처럼 다채로움으로 가득 찼던 공간이 어두운 고야의 그림처럼 점점 시들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형형색색의 화려한 식물 집은 죽음을 담은 관으로 그 역할이 바뀌어갔다. 신화 속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가 그 공간에 아예 눌러앉은 것처럼 ‘생’의 존재들은 줄줄이 생을 마감하거나, 마감하기 직전의 코마 상태에 빠져버렸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릴레이를 막을 어떤 해결책도 없이 거의 포기 직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올린 식물 카페 게시글 아래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같은 식물계 어벤저스의 구원의 메시지가 줄줄이 달리기 시작했다. 흙의 종류, 환기, 온도, 배수 등등 여러 가지 원인 분석과 해결책이 쏟아졌지만, 모두가 공통으로 하는 말은 ‘집의 크기’, 다시 말해 화분의 크기였다. 식물에 맞지 않는 크기의 화분을 썼을 때 배수나 통기가 되지 않고,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젖은 흙에 식물들이 질식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죽은 식물들이 죄다 2배, 심한 건 2.5배보다 큰 화분에 심겨 있었다. 예쁘고 보기 좋게 공간을 장식하려는 욕심으로 각각의 식물을 맞지 않은 집에 밀어 넣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무식과 용기가 시너지를 내어 일으킨 연쇄적 핵폭발이나 다름없었다.


그날로 바로 근처 화훼단지로 달려갔다. 대형 하우스 한 구석 분갈이 재료를 파는 곳에서 몇 가지 종류의 흙과 다양한 크기의 투명색 플라스틱 슬릿 화분을 구입했다. 굵기가 다양한 흙이나 특수 흙은 배수를 좋게 해주어 과습을 막아주고, 투명화분은 뿌리와 흙 상태를 잘 보여주어 물 마름의 정도를 쉽게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어벤져스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며칠 전까지 생의 기운으로 춤추던 식물들을 한꺼번에 죽음의 신에게 보내버린 죄책감으로 각종 식물 영양제도 담았다.


이미 초록별을 건너버린 식물들과 저승 문턱에서 노크 중인 식물들을 차례로 관에서 꺼내다보니 권여선 작가의 단편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가 떠올랐다. 소설 속에서 화자인 ‘나’에게 현수는 솥이나 냄비, 쓰레기통, 세숫대야, 심지어 피로 속을 감싸는 만두나 우리가 생활하는 방조차도 화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각자에게 적합한 조건이면 그 모양이 어떠하든 화분이 될 수 있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 낸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화분이 될 수 있다는 소설 속 화자의 대화를 곱씹으며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일지 생각했다. 관심과 애정을 주고, 자리를 마련해 주고, 물도 규칙적으로 주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각자의 대상에 맞지 않는 화분을 주었다는 데 있었다. 아무리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도 그것이 머무르고 있는 공간이 맞지 않으면 제대로 뿌리내리지도, 살아내기도 버거워지는 것이다.


식물에 그 크기와 환경에 맞는 적합한 화분을 내어주는 것과 같이 나에게 있어서의 화분, 인간관계에서의 화분, 사회생활에서의 화분의 크기와 상태는 어떠했을까. 늘 좋아 보이는 곳을 찾고, 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며, 불편한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식물의 뿌리가 썩어가듯 마음은 병들어가는데 제대로 살피려 하지 않는 일상이었다. 아슬아슬하고 버거운 시간을 겨우 살아가다가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전염병으로 강제로 일상을 정지당했다. 절망에 좌절의 조미료를 뿌린 듯 언제가 더 최악인지 구분도 안 되는 그 시기에 식물을 들이고, 그들을 죽이고, 그 덕에 그들처럼 썩어가는 자신의 시간을 되돌아보는 여기까지 왔다.


식물이 좋은 점은 애써 말하거나 힘주어 다그치지 않아도 자신의 속도에 맞춰 살아낸다는 것이다. 언제 보아도 좋은 식물을 오래도록 보기 위해서, 아니 같이 살아내기 위해서 식물의 화분뿐 아니라 내 화분도 자주 살피겠다는 다짐한다. 지금 있는 분이 적당한지, 속이 썩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나아가 사는 공간뿐 아니라 스스로가 내면을 잘 담아내는 딱 맞는 화분이 될 수 있도록,

넘치지 않는 크기에 적당한 속도로. 오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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