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a Feb 09. 2024

술꾼의 임신일기 1

임신한 술꾼은 혼술이 그립다

최근 십년쯤 동안은 적어도 열흘 이상 금주를 해본적이 없는것 같다. 열흘이 무슨말인가... 사실 매일 저녁 맥주 따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곤 했다. 나를 금주하게 있는 최후의 수단은 임신밖에 없을 거라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결혼 8년만에 임신을 했다. 


그동안 딱히 우리는 아이를 갖고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저 현재 우리의 삶이 즐겁고 좋아서 이걸 놓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임신=금주 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 있었던것 같다. 최소 10개월을 맥주 한모금 못마시다니! 있을수 있는 일인가... 


그래서인지 금주 5개월 차가 된 지금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과 감정들을 발견하고 있다. 그것이 모두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생에서 없었던 경험들을 새로이 하며 나를 돌아보고 있다. 


우선, 술이 가장 생각날때는 회식이나 지인들과의 술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혼자있을 때 라는 것. 


여럿이서 하는 회식은 사이다나 탄산수 따위를 마시면서 적당히 수다를 떠는 것으로 버틸만 하다. 물론 10시~11시가 넘어가는 순간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취하기 떄문에 슬슬 말이 안통하고 재미없어지기는 하더라. 같이 취해갈 때는 어느 때 보다도 말이 제일 잘 통하고 재미있는 시간대 였는데, 참으로 신비하도다. 그래서 어떤 저녁 약속이 있어도 요즘 나의 귀가시간은 보통 9시를 넘기지 않는다. (이 얼마나 우리 엄마가 꿈꿨던 딸의 삶인가...)


하지만 회식은 그립지 않은데 혼자 마시는 나만의 술이 그립다. 어느날 혼자 한남동 쯤에 외근나갔다가 일찍 퇴근하고 마시는 펍의 맥주 한잔, 주말에 집안 정리를 해놓고 오후 햇살을 즐기며 따른 와인 한잔, 멘탈 탈탈 털린 하루를 보낸 저녁에 나를 위한 홈메이드 하이볼 한잔... 이런것들이 너무 그립다. 


혼자 마시는 술이란 그런 것이다. 들어주기만 하는 친구와의 시간 같은것.
그래서 요즘은 나의 가장 내밀하고도 편한 친구를 하나 잃은 느낌이 든다. 


혼자 마시는 커피나 차는 외롭다. 혼자 마시는 맥주는 외롭지 않았는데...

약속시간에 먼저와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할 때, 나는 커피숍 보다는 차라리 먼저 술자리에 자리잡고 들어가 혼자 마시고 있는 편을 택했다. 저녁 약속 사이에 잠깐 시간이 뜨게 되더라도, 만나기로 한 친구가 갑자기 늦더라도 먼저 맥주 한잔 하고 있으면 기다리는 시간은 별로 심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저녁약속 시간에 먼저 도착해서 시간이 살짝 뜨는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저녁 6시 이후에 커피숍에 들어가봤다. 커피숍에서 심지어 카페인이 없는 허브티를 시켜서 마시고 있자니 어쩐지 쓸쓸하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술한잔 하면서 시간을 가기를 기다릴 때 나는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술 이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짐했다. 이 귀한 술을 다시 마실 수 있게 된다면, 한잔 한잔 아껴서 음미하며 마시겠다고. 여럿이 술자리에서 의미 없이 때려 마시고 만취하는 술은 이제 이 나이엔 마시지 말아야지. (사실 이렇게 다짐했지만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에 출산 이후의 나는 다시 어리석은 짓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서촌, '동해 남부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