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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a Mar 03. 2024

술꾼의 임신 일기 3

임신해서 좋은점?

임신해서 안좋은 점은 당장 나열하기에도 너무 많다.


나의 경우, 일단 가장 큰 취미인 술을 못마신다. 술을 못마시니 지인들과의 저녁약속이 거의 없어졌고, 파워 E인 나는 이것이 외롭다. 술을 못 마시니 좋아하던 음식(주로 안주류)들도 딱히 땡기지 않게 됐다. 그래서 요리하는 재미가 줄었다. 또, 살이 찌고 맞는 옷이 없어서 꾸미는 재미도 없어진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다. 비행기 타고 장거리 여행도 어렵다. 내 몸을 내 맘대로 쓰거나 컨트롤 할수 없고, 운동을 풀 파워로 할수가 없다. 좋아했던 킥복싱이랑 크로스핏을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임신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


일단 아주 사소한것 부터는, 임신을 하니 머리카락이 안빠진다! 나는 평소에도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져서 항상 스스로 탈모인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최근에 확실히 머리카락이 덜 빠지는걸 느낀다. 머리 감고 나서 머리를 말릴 때 바닥에 한 움큼씩 널려있던 머리카락들이 요즘은 없다. 드라이기를 새걸로 바꿔서 그런가 했는데, 알고보니 이게 임신 증상이었다. 하지만 좋아하긴 이르다. 애 낳아본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 안빠지고 있던 머리카락들이 출산 이후에 우수수 다 빠져버린다고 한다.... 조삼모사였다. 예비 탈모인일 뿐이었다. 


그리고 뭔가 이뤄내기 위해 빡세게! 노력해야만 하는 삶에서
일시적인 자유를 얻었다.


그동안 항상 무언가 해내고 이루어내야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직을 여러번 하면서 회사에 적응하고 인정받고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삶. 일상에서도 나의 시간들을 헛되이 보내지 않아야 된다는 마음으로 뭐라도 배우고 생산적인 것을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하지만 뱃속에 자리잡은 아기를 키우는 것이 일단 삶의 최우선이 되어버렸으니, 당분간은 몸 관리 이외에 뭔가를 해내야 하는 삶에서 잠시 해방된 느낌이다. '열심히 해내도 되지 않을 자유' 라니 조금 이상하긴 하다.


일단 임신을 하니 내가 해왔던 것들을 강제로?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초반부터 많이 생겼다. 초기에는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조심하라고 해서 운동을 하나도 못했다. 주 3회씩 하던 수영도 일단 중단하고, 주말에 하던 인왕산 등산이나 홍제천 자전거 타기도 못하니 그저 집에서 고양이랑 굴렀다. 물론 운동을 좋아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숙제하는 마음으로 갔던 운동을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다고나 할까....


임신 전에 나는 주말에도 항상 바빴다. 직장인 밴드 연습과 공연, 일요일 성당 활동까지 항상 스케줄이 꽉 짜여져 있는 휴일 아닌 휴일을 보냈다. 물론 모두 즐겁기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활동들이었지만 순식간에 주말이 지나고 나면 월요일이 더 피곤할 때도 있었다. 내가 벌려놓은 즐거운 일들이 어느 순간 의무로 느껴져 쉬고싶다는 생각도 들었더랬다.


요즘은 주말이 아주 고요하다. 아u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오롯이 집에서만 보내는 주말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해도 되나 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 때도 있지만,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쓸데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죄책감 없이 즐겨보려 한다. 덕분에 집과 나를 돌볼 시간이 더 많아지고 고양이와의 시간도 더 많아졌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허기를 채우듯 허겁지겁 사람을 갈구했던 것 같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나만의 휴일을 보내면서 스스로 채우는 시간되는 같다.


항상 내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해왔던 '회사에서 인정받는 부분'에서도 조금은 쿨해지려고 한다.

얼마전에 회사에서 승진 대상자 자격 교육을 다녀왔다. 무려 2박3일 연수원 합숙으로 상당히 빡센 교육이었다. 이걸 마친다고 모두 승진을 시켜주는것이면 좋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저 자격을 하나 통과한것 뿐. 사실 올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울테니 승진 연차라고 해도 어차피 별로 기대를 하지는 않고 있다. 예전같으면 경력직으로 굴러들어온 대기업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있는대로 스트레스 받아가며 고과를 받아내려고 했을텐데,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적당히 하려고 한다. 사실 나는 적당히 하는게 안되는 사람이라서 어느 까지 하는게 '적당히' 인지는 모르겠다. 뭔가를 해내야된다는 불안과 압박감을 가지지 않는 만으로도 나에게는 적당히 하는 느낌인 것 같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충'인 나는 지금의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지는 못하고 있다. 임신 단축근무로 근무시간도 2시간이나 줄어서, 그동안 술마시느라 못했던 영어 공부, 못 읽었던  읽기, 수영 꾸준히 하기, 브런치에 (술꾼의 임신일기) 쓰기 등을 마치 과제같이 해내려 하고 있다....(우리 밴드의 신곡도 만들고 싶은데 이건 아직 못했다.) 그리고 3월에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것 문에도 할일이 많았다. 연초부터 각종 이사관련 준비와 짐정리, 인테리어의 나날로 보냈다. 지금 '심연의 냉장고'를 포함한 모든 집구석을 한번씩은 다 털어서 매우 후련하다.


이렇게 할일이 있다는게 나는 좋은것 같다.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쓸모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압박감이 있는데, 할 일이 많아지면 그게 해소되는 같다. 애 낳으면 할일이 훨씬 많아질텐데 왜 지금 즐기지 못하고 사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임신을 하니 별 이상한 깨달음이 다 온다.

어느날 버스 출근을 하면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오래된 물음에 대한 나만의 답을 얻었다. 임신한 엄마의 입장에서 이건 무조건 닭이 먼저다. 엄마가 먼저 존재하고 행복해야 좋은 달걀을 생산하고 병아리를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은 예비 엄마들이 출산하고 육아를 하면서 나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 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 이기적인 엄마일지라도 내가 먼저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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