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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a Jan 30. 2020

적당한 필터가 필요한 세상

2. 나는 왜 술을 마실까

나는 그를 싫어하려 노력하였으나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인정하기로 했네
사실 마음 속 깊이 나도
그를 좋아하고 있었음을..
- 자작 단편시 '술' 중.. -


술 글을 쓰려면 역시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아서, 술을 마시고 글을 쓴다.


나의 술 역사는 바야흐로 19년 전으로 거슬러가  중3 겨울방학때 였던것 같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동네 친구들끼리 한집에 모여 소소한 자축 파티를 했는데, 때 마침 친구 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분위기는 더욱 자유로웠다.


그때 누군가가 호기롭게 제안을 했다. "우리 맥주 사오기 내기 할래?" 그 당시 학교 앞에 민증 없어도 잘 뚫리기로(?) 유명한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가위바위보로 진 사람이 다녀오게 되었는데, 내가 당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살떨리던지..


어찌 어찌 하여 친구의 살떨리는 희생과 용기로 인생 첫 맥주를 맛보게 됐다. 첫맛은 너무 쏘고 뒷맛은 너무 썼던것 같은 내 맥주의 첫 기억은 이미 너무 오래되어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술과의 인연은 대학교 때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엄마와의 지리멸렬한 술 잔소리 전쟁의 서막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우리집은 술을 좋아하시는 애주가이자 다주가 아빠로 인해 근 20년간 끊임없이 정신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술은 절대 좋아해서는 안되는 것', '술을 마시는 것은 죄다' 따위와 같은 사고를 머리에 주입받으며 20대를 맞이했다.


그래서 대학 시절은 술과 나의 밀당의 나날이었던 것 같다. 술자리의 나는 분명 즐거운데, 왠지 술을 좋아한다 라고 인정해버리면 안될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I Don't Like the Drugs(But the Drugs Like Me)
- by Marilyn Manson -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의 밀당은 전환기를 맞는다. '술 잘먹는 사람이 일도 잘해' 라는 당시 사장님의 모토로 술에 대해 유난히 너그럽고 관대했던 조직에서 참 많이도 마셨다.  저 사훈(?)대로 라면 아마 난 일을 꽤 잘하는 축에 속했을 것이다.


스무 살 쯤 많은 선배들과는 일과 인생을 안주 삼아 한잔 나누고, 후배들과는 선배들을 안주삼아 전우애를 다지고... 그러다 보니 술의 묘한 힘도 알게 됐다. 어떻게 풀어야 될지, 어떻게 다가가야 될지 어려웠던 것들이 가끔 술의 힘으로 마법같이 풀리는 경우를 봤다. 그래서 그때부터 술을 좋아하기로 했다. 아니,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모든 술에는 이유가 있다.


평일에는 회사 일이 안풀려서, 휴일에는 여유를 즐기고 싶어서, 운동 끝나고는 목마르니까, 친구가 우울한 날은 이야기를 들어줘야 되니까, 뭐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하다 못해 미세먼지 많은 날은 목을 씻어야 되니까 삼겹살에 소주....

하여튼 술꾼들은 모든 세상 만사의 핑계로 술을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회사를 옮긴 초반, 가장 적응이 안되고 어쩐지 슬펐던 것은 같이 술 마실 사람들이 없어졌다는 거였다. 온갖 핑계로 나와 술을 마시고 내가 마셔주던 내 편들이 다 없어진 느낌.

특히 새로운 조직의 문화는 술에 대해 관대했던 그 전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나는 외계의 별에 떨어진 지구인, 아니 금주의 별에 떨어진 술꾼 이었다. 


덕분에 그래서 커피를 마시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꽤 많은 것을 풀 수 있다는 것 깨달았다.

밖에서 쓸데없이 시끌벅적 노는것 보다는 집에서 소소히 는게 값지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인생에 너무 맨정신만 있으면 그것도 너무 슬픈 삶이다.


간의 알콜 필터가 씌워져 모든 것이 둥글둥글 해지는 순간이 나는 좋다. 당히 터가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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