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열흘 만에 파양 당한 배달이
고르고 골라 삼베 고른다더니 배달이가 딱 그 짝이었다. 그렇게나 까달시리 입양처를 골라 개를 보냈건만 배달이는 보란 듯이 열흘 만에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나는 이때 업무상 해외에 있어 배달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반나절 늦게 전해 들었다. 시차 때문인지 배달이 걱정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해 타이레놀을 사 먹었다.
사실 배달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몹시 들떠 있었다. 아이들 입양 완료 파티를 준비하며 신이 단단히 나 있었다. 이렇게 신났던 게 언제였는지 헤아려 보니 까마득했다. 사고 이후 나는 감정이 무뎌질 대로 무뎌져 (PTSD 후유증) 어지간한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누군가 내 앞에서 가슴을 치며 하소연해도 겉으론 귀담아듣는 척하며, 속으로는 하품을 했다. 초상집에 가 목 놓아 울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내 앞에서 가슴을 치며 공감해 달라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전에 해탈이가 사고 쳐 남의 집 개를 물었는데도 머리로 상황을 이해하다 되려 일을 키워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네 개가 우리 개한테 와서 칼빵을 놓고 갔다. 너도 같이 피 냄새를 맡아야 정신 차리겠냐 하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니까 말 한마디만 잘했어도 사과만 제대로 했어도 될 일을 계속 이해하느라 남의 속을 더 긁은 셈이었다.
이 얘기를 정신과 선생님한테 말 하니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식의 사고 패턴은 내가 겪은 PTSD 증상 중 하나라고 한다. 주로 참전 군인들이 호소하는 증상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런 일을 겪은 후로는 어지간한 일에 눈물도 안 났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 아니면 딱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빛 엄마 역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자식 죽고 나니 모든 게 다 시들해요.
한데 말이다. 배달이 배송이를 입양 보내고 나서는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저는 삼풍생존자입니다’ 책을 쓰고부터 이날 이때까지 밤낮으로 나는 죽은 사람들 얘기만 쫓아다녔다. 누굴 만나도 나는 죽음부터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슬프고 억울한 얘기는 파도 파도 계속 나왔고 그런 얘기를 또 쓰고 말하자니 나 역시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우울한 사람이 됐다.
또 재난 참사 피해자로 사람을 만나고 그 일에 대해 기록하고 말하는 내 역할이 싫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이 일이 마냥 기쁘지도 않다. 아무리 내가 남의 감정에 덜 휘둘리는 사람이라 해도 그렇지 나도 기본적으로 “상실”이 어떤 건지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현장을 찾아다니고 사람을 만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일을 하는 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서다. 세월호에서 이태원으로 이어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재난재해 피해 사고들 이에 대해 나는 말해야 한다. 왜 살아남았으니까. 또 나는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과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 서로 잃은 게 많으니까. 그러니 별안간 부지불식간에 자식을 잃은 부모를 가슴을 뜯고 우는 사연을 들으면 나는 그 사연에 시뻘건 피를 묻혀 글로 옮겨 쓸 수 있다. 그래서 한다.
와중에 배달이 배송이의 일은 예상치 못한 경사였다. 이 작고 하찮은 짐승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그토록 기쁠 줄 몰랐다. 해서 나는 택배들 구조와 임보 입양에 연루된 인연들에게 날을 잡아 근사한 파티를 하자며 혼자서 김칫국을 신나게 마셨다.
서울과 부산의 중간인 대전에서 반려견 운동장을 하나를 빌려 아는 개들도 다 초대해 놀자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전날 먼저 내려가 운동장에 만국기도 걸고 오케스트라도 단상에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소박하게 티셔츠나 한 장씩 맞추자 했다. 그러려면 사전에 수요조사를 해야겠지? 하며 혼자 반팔이 좋을까 후드가 좋을까 사진첩을 뒤졌다. 그러고 보니 녀석들이 유기 됐을 때 일러스트레이터 김삼분님께서 그려준 그림이 감사하게 있어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일을 진행하면 될 것 같았다.
그뿐인가 훗날 녀석들이 방을 뺀 날을 기념해 이매해 유기견 입양 센터에 후원도 얼마 할 생각이었다. 이미 복주와 해탈이 생일 즈음에 케이크값 아껴 여러 동물 보호단체에 후원하고 있으니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리라 모처럼 좋은 일로 돈 쓸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때 배달이가 돌아온 거다. 녀석을 돌려받은 건 마지막까지 배달이를 돌보던 룽지누나였는데 그 집에선 녀석이 쓰던 용품 그대로 비닐봉지에 아무렇게나 욱여넣어 룽지네로 개를 데리고 왔더란다. 그래서 대체 그 사람들 왜 배달이를 돌려보낸 거냐며 함께 구조한 이들에게 물으니 중간에서 연락을 대신한 지구 누나가 내게 메시지를 하나 보여줬다.
그 글에는 본인의 다섯 살 난 딸아이가 배달이를 괴롭혀 더는 배달이를 키우지 못하게 됐다는 핑계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아니 그런데 나는 파양사유가 도대체 납득되지 않았다. 설령 진짜 본인 딸아이가 강아지를 발로 밟고 괴롭혔다 치자. 그래서 못 키운다 좋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어른이고 아이 엄마라면 적어도 애 핑계는 안 대야 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열흘 만에 하숙집으로 다시 돌아온 배달이는 놀랍게도 이전과 달리 대단히 위축돼도 주눅 들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어린 개한테 열흘이란 시간은 매우 길었던 모양이다. 룽지누나 말에 따르면 전에는 목욕시키면 그걸 즐기던 녀석이었는데 이제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무서워하고 타월을 보면 자지러진다고 한다.
또 자꾸 어딘가로 숨고 외부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한단다. 특히나 가슴 아픈 건 배달이가 쉬고 있을 때 근처로 사람이 지나가면 깜짝깜짝 놀란다고 한다. 누나는 정성을 다해 배달이를 다시 돌 보고 있지만 사람만 보면 눈치 보고 피하는 녀석의 행동을 보면 이전의 배달이 모습을 다시 못 볼까 두렵다고 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친한 훈련사 말이 실제 개들도 사람만큼 파양 후유증을 겪는다고 한다. 대부분 사람에게 곁을 안 내어주고 두려움과 공포에 가득 차 말썽을 일으키는 개들을 보면 전부 파양 후유증이라 봐도 무관하다 했다.
그렇게 입양 갔던 배달이가 어느 한 날 갑자기 돌아오며 계획하던 파티는 취소 됐고, 우리의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 배달이 반품 사건의 문제는 배달이 주가가 한창 높을 시기를 한 달 넘게 저 집에 입양 문제로 엮여 입양 체험까지 다녀오느라 최적의 입양시기를 놓쳤다는 데 있다. 그리고 또 녀석이 돌아오며 내게 생긴 말 못 할 근심 하나는 돌아온 배달이 얼굴이 그새 말도 못 하게 못생겨진데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이 바닥도 외모 앞에선 냉정하다. 입양 시장에서 가장 으뜸가는 건 여전히 품종과 외모다.
해서 나는 나이 오십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는 오늘 지구 누나와 통화하면서 “이 얼굴로 이제 어떻게 입양 홍보를 해.”라고 못나게 굴었다. 그러자 지구누나는 그 정도로 못 생겨지진 않았어요 괜찮아요 다시 하면 돼요라고 되려 나를 다독였다.
이날 이후 나는 결국 내가 세 마리의 개를 기르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네 마리보다는 낫지만 세 마리라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그도 그럴게 사실 한창 예쁜 시기를 지난 시골 개는 입양 판에서 주목을 끌지 못한다. 아마 기회가 있어도 해외에나 있을 것이다. 저 작은놈을 하나 우리끼리 못 키워 외국에 보낸다니 가당치 않다. 사람 아기 입양 보내는 것도 수치스러운 판국에 개까지 보내다니 그 일에 내가 일조하다니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내가 거둬야지. 둘이나 셋이나 또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뭐.
솔직히 배달이를 파양 한 그 가족에게 그땐 원망스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고마운 점도 있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파양 할 때 다른 데 몰래 내 버리지 않고 우리한테 돌려준 것이랑 더 길게 시간 끌지 않고 열흘 만에 되돌려 준 것이다. 이후 배달이한테 더 좋은 인연을 찾아 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