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대기업에서 아니, 지본 주의라는 먹이사슬에서 나 같은 '종'이 오래 서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시스템적으로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대한민국 기업 문화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특히 내가 다녔던 회사처럼, 기술영업이 주류인 B2B 제조업의 경우, 공대 출신에 군필자를 현장에서 압도적으로 선호하고, 여성인력을 채용한다 하더라도 20대 초반의 계약직 사원을 뽑아 2년 정도 꽃 같은 일 시키다 내보내고, 다시 받으려 한다.
물론 요즘엔 제조업에서도 대졸 공채로 여성인력을 많이 채용한다. 하지만 이렇게 입사하는 친구들도 실상 조직에서 오래 버티는 건 아니다. 이는 구글 창에서 대한민국 제조업에 근무하는 여성인력의 직급 분포도나, 여성 임원의 인력 비율을 확인해 보면 누구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해서 나는 이들 눈에 오래도록 "변종"으로 보였을 거다. 이들이 오래전에 화초라 여기고 들인 잡초니까 말이다. 그것도 다른 수목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잡초, 게다가 잡초면 잡초답게 낮은 자세로 짜져 있어야 하는데,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잡초.
여기서 잠깐, 한데 내가 어쩌다 화초가 아닌 잡초로 성장했는지 잠깐 짚고 가야겠다. 나는 사실 어려서부터 학업에 대한 재능이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또 학창 시절 어쭙잖게 그림까지 그리는 바람에 재수는 물론이고 삼수를 하고도 서울 인근의 전문대 디자인과를 나왔고, 하필 졸업 무렵엔 IMF가 터져 제때 취직도 못했다. 당시 같은 과 졸업생들은 한 두 명 정도만 충무로 인쇄소에 취직했으니 말이다. 해서 나는 내 생에서 그림 그린 이력을 통째로 들어내고 고졸 사무직 구하는 곳을 골라 입사 지원했다. (디자인과 나왔다고 하면 어느 일자리든 분야가 맞지 않는다고, 서류 전형에서 전부 탈락시켰다) 물론 처음엔 단기 계약직이었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회사를 오래 다닐지 몰라서, 고졸이나 전문대 졸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싶어 입사할 때 적극적로 뭘 따로 하지 않았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나, 스무 살에 불행하게 아버지를 여읜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신 아버지 친구분께서 당시에 제약회사를 크게 하셨는데, 꽤 오랜 기간 나를 그 회사에 유령직원으로 취직시켜 월급을 주셨고, 시간이 지나니 그 일이 뜻밖의 경력이 되어 (보험이나 연금이 나갔기에) 그 덕에 지금 이 회사에 경력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맞다.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한데 그땐 어려서 이게 불법인 줄도 몰랐다.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지금은 다정하시던 아버지 친구분도 돌아가시고, 그 제약회사마저 오래전에 없어졌으니 말해도 되겠지 싶어 말하는 거다.
앞선 연재물을 본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학창 시절 삼풍백화점 사고를 겪은 생존자다. 해서 내 머릿속엔 항상 죽음이라는 단어가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매일 아침에 시작하는 딱 '하루'에 대한 생각만 하고, 오로지 그날그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았다. 당시에 나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를 걱정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공부가 다 뭔가. 사고 이후엔 연필을 잡고 책상에 앉으면 멀미부터 났다.
그러다 서른을 넘긴 어느 날 갑자기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한 후, 못다 한 공부를 마저 하긴 했지만, 그 후에 업데이트된 생의 이력들이 대해서는 인사팀에 따로 얘기하지 않았다. 알린다 한들 내 처우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의 경우, 같은 색 네임텍을 목에 걸고 있어도 대졸 공채(ㅁㅁ맨 식의), 그러니까 모든 업무를 할 수 있는 종합직, 또 그런 종합직의 보조 역할을 하는 일반직, 계약직 등으로 인사권 자체가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정해진 직종은 퇴사할 때까지 전환이 불가한 게 원칙이다.
하지만 한때 나를 아끼던 본부장이 내가 대졸 공채 이상의 일을 해내니, 종합직으로 발령을 내달라고 인사팀에 정식으로 요청했다. 한데 얼마 후 인사팀으로부터 선례를 만들 수 없어서 안 된다 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렇다. 예외는 어디까지나 예외지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난 이걸로 족했다. 회사에서 인정을 안 해 주면 어떤가, 내 직속 상사가 나를 인정해 주는데. 그거면 됐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보다 적게 받고 많이 일하면 왠지 모르게 떳떳해 좋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솔직히 나보다 좋은 학교를 나온 이들이 이 회사 오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잘 모른다. 그러니 같은 일을 하고 월급을 차이 나게 받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잖아. 이들이 여태 투자한 시간과 돈이 얼만데, 하는 식으로.
또 나는 이 조직에서 특이하게도 그간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다. 시실 우리 회사같이 보수적인 집단에서 나 같은 직군이 해외출장 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면 일반직에게는 대개 중요한 일을 시키지 않으니까, 한데 나는 운 좋게도, 함께 일했던 상사들께서 대졸 공채와 동등하게 일 할 기회를 주었고, 중요한 프로젝트도 많이 맡겼기에, 그에 따라 미국이든 유럽이든 업무에 필요하다 싶으면 바로바로 출장을 보내줬다. 덕분에 나는 오래도록 이 일이 당연 한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이일도 영원하지 않았다.
나를 아끼던 본부장께서 퇴임하시고 다른 분이 후임으로 오셨는데, 이분은 나를 딱 고졸 일반직 여사원 그 이상, 이하로도 보지 않았다. 그러다 한 번은 이분이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에' 날 이태리로 출장 보내 준 적 있었는데, 그날 밤 그분은 내게 전화해 한참이나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참 어려운 결정을 한 거다. 대졸도 아닌 너를 해외 출장 보내는 게 내 입장에서는 보통 일 아니거든, 그러니 앞으로 잘해라". 그 소리를 듣고 처음 한 번은 참을 만했다. 그래 그런가 보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하지만 그분은 그 후로도 정확히 두 번이나 더 전화를 걸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참 너를 해외 출장 보내 주는 게..." 그러니 잘해, 그러니 잘해, 그러니 잘해.
그 말을 듣는데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마음 같아선 이태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아니 막말로 내가 어디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시킨 일하러 가는 건데 어째서 나는 저런 말까지 듣고 가야 하는가, (아마 이 사람은 기억 조차 못할 거다), 그뿐 아니다. 그는 어느 자리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항상 내가 처음 이곳에 어떻게 입사했으며,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게 누구 덕분인지를 꼭 강조했다.
맞다. 그분 말대로 이 조직에 내가 단기 계약직으로 들어온 것도 사실이고, 여러 모로 그분께서 도움을 준 것도 맞다. 틀린 말 아니다. 두고두고 이 일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 많은 자리에서 굳이 매번 그걸 밝혀야 했을까. 하여 나는 이분과 일하는 내내 속으로 말도 못 하게 괴로웠다. 분명 그분은 나한테 잘해주었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분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악의 없이 나를 이용해 계속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할 때마다 나는 종종 연말에 부잣집 사모님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드는 불우 이웃의 심정이 되어 버리곤 했다.
게다가 이 상황이 더 절망스러웠던 건 이분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분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젠틀한 사람이었다. 해서 그때 알았다. 지금이 틀린 게 아니라, 예전이 특별했다는 걸.
이때부터 나는 기약 없는 슬럼프에 빠졌다, 게다가 그 무렵 내가 팀에서 하던 주 업무 (그룹 상표권관리)까지 많이 축소되어 더 그랬다. 일이 그렇게 되자, 한 순간에 나 자신이 너무나 쓸모없게 느껴져 매일같이 자존감이 바닥을 쳐, 어디가 말도 못 하는 속 깊은 우울을 앓았다. 그러다 결국 그해 봄 극심하게 상태가 나빠져 거의 2주간을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그땐 정말 밖에 나가면 아무데서나 뛰어내릴 것 같은 생각에 필사적으로 방바닥에 붙어있어야 했다.
어쨌든 그 시절을 견딘 후 다시 몸을 추스르고 회사에 복귀했다. 하지만 이때 이후로 내 마음의 병은 자꾸만 더 깊어졌다. 마음이 신산하니 자리에 있기 싫어 전보다 외근 거리를 더 많이 만들어 자꾸 밖으로 돌았다. 솔직히 이때는 전화로 의사 결정해도 될 일도 굳이 업체를 찾아가 미팅을 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슬슬 내 얘기를 하나 둘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쟤는 뭔데 외근을 자꾸 나가냐, 그리고 무슨 빽으로 이 주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팀장한테 깨지지 않느냐. (사실, 우리 팀장님은 내게 늘 업무 관련 보고를 받고 있었고, 내가 아픈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후 일 년쯤 지났을까, 해당 임원은 다른 일에 연루되어 퇴사했다. 하지만 그의 퇴사와 내 상황은 어디까지나 별개였다. 그 일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행의 바다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월급쟁이가 별 수 있나, 기분은 기분이고 일은 일이니,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지. 하여 나는 다시 심기일전하여 전처럼 열심히 일할 준비를 했다. 한데 이 무렵부터 내가 사람들의 입에 본격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 근태가 안 좋다, 개념이 없다" 하는 말들로 말이다. 처음엔 그냥 참았다. 그들이 하는 말이 내가 듣기에도 아니 뗀 굴뚝의 연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명하지 않고 계속 내버려 뒀다. 그랬더니 소문은 금세 믿기 힘들 정도로 몸집을 키워나갔다.
한데 나 여태 이 십 년의 세월을 이 사람들이 얘기하듯 그렇게 형편없이 보낸 건 아니다. 나는 정말 그 회사에서 무슨 일이됐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했다. 정히 내가 하는 말 못 믿겠거든, 그간 나와 함께 일했던 상사들에게 내가 그동안 어떻게 일 했는지 한 번 물어보시길.
어쨌든 나에 대한 가십은 마른 숲에 불붙듯 삽시간에 번져나갔고, 이 일을 겪으며 나는 극심한 대인기피에 걸렸다. 그리고 그때 얼마나 사람들의 '말'에 시달렸는지 당시 나는 꿈에서조차 사람들의 비웃음과 야유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면 나는 정말 그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아 매일 아침 이를 악물고 열심히 책상 앞에 가 앉았다. 속으로 일 년만 버티자. 딱 일 년.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고개 처박고 일만 하던 그 시절에도 나는 원치 않게 내 소문을 만들고 뿌리는 이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나 이전에도 이미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따돌렸는데, 앞선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거나 사라져 주었기에 아무도 이 일에 대해 몰랐던 거다.
해서 언제 한 번 나는 이들이 사내에 뿌리는 악의적인 모함들을 수집해 팀장님께 보고하며, 회사에서 정식으로 이들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개인적으로라도 이들을 허위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훼손과 모욕죄로 고소하겠다 했다. 물론 증거는 충분했다. 그러자 이들 중 핵심인원인 한 여직원이 상부에 불려 가 경고를 받았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앞으로 두 번 다시 사내에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퍼트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입으로 하는 약속은 그저 말뿐이었다. 이들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내 얘기를 하고 다녔다. 나중엔 숫제 블라인드라는 익명 게시판까지 이용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때 나는 진짜 멍청하게, 열심히 일해서 내 실력을 다시 증명해 보이면 그깟 소문 같은 거 곧 잠잠해 질거라 믿었다. 하지만 천만에, 이들은 내가 그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지던 날까지 내 얘기를 계속하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때도 이를 악물고 버틸 때였고, 팀 송년회가 있었다. 송년회 분위기답게 시간이 좀 흐르자 다들 얼큰하게 술이 좀 올랐다. 그러자 이들 중 한 명이 내게 관대한 표정으로 이런 식의 뉘앙스를 풍겼다. '우리도 너랑 일하는 거 불편해, 대체 네가 여기서 왜 버티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 상황은 서로 피곤하니 이쯤에서 네가 먼저 숙이고 들어와 주렴, 그러면 우리가 좀 봐줄게, 하는 그런 어떤?
해서 깨달았다. 나는 이들과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음을, 그 자리에서 죽으면 죽었지 이들에게 먼저 고개 숙이고 들어갈 수 없음을, 해서 나는 굳은 얼굴로 외투를 집어 들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외쳤다. 아니. 천만에, 그렇게는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