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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재수 없다는 이유로

by 산만언니

농경사회에서는 원수를 만나려면 외나무다리까지 가야 했겠지만, 현대사회에서 원수는 회사에서 같은 팀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쉽게 쉽게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그렇지 않고는 이 상황에 대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징계를 받던 해 10월 나는 조직개편과 함께 부서이동을 했다. 그 해 사고 이후 전에 함께 일하던 팀원들과 사이가 불편해져 안 그래도 회사 생활이 좀 힘들었는데, 때 마침 새로운 팀에서 영입 제안이 왔기에 주저하지 않고 수락했다. 한데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아뿔싸, 여우 피하다 호랑이 만난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알고 보니 새로운 팀에 합류할 사람들이 전부 그간 이 조직에서 나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먼저 A의 경우, 그는 전 부서 인사담당이었는데, 처음부터 나를 경원시했다. 공채 입사자라는 선민의식이 있어 그랬나, 어쭙잖은 출신의 내가 한 자리 차고 있는 모양새를 그는 평소에도 못마땅해했다. 한데 그런 내가 보기 좋게 사고를 치자, 내 사건을 마구 잡이로 캐고 다녔다. 그뿐인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는 사고 당일 내가 몰았던 차를 정비소에서 찾아내 블랙박스를 입수한 뒤 내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영상을 추출해 상부에 보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파일을 본사 인사팀에 보내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당시 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게 살면서 타인에게 이토록 열심히 미움을 받은 게 머리털 나고 처음인 데다, 생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오가다 마주치면 웃으며 서로 인사를 주고받던 동료가 나한테 먼저 " 대체 무슨 일로 그랬냐, 왜 그랬냐" 하며 물어보는 게 아니라, 마치 피해자로부터 사고 접수를 받은 강력반 형사처럼 "유죄추정의 원칙"으로 나를 대한다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나는 그 무렵 용기를 내 그에게 따로 전화 해,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다 설명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얘기들 끝까지 듣지도 않고, "지금은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일방적으로 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또 다른 다른 사람인 B는 이 회사에 경력 입사 한 친구였다. 처음 입사했을 때 나와 직급 차이도 나고, 나이 차이도 있으니 한동안 내게 굉장히 깍듯하게 굴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서 진작에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한데 나는 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혼자서 그 친구를 계속 예뻐했다. 어쩌다 회사 근처 술자리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기쁜 마음으로 선뜻 술값도 대신 계산했고, 그 친구 아이가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내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근처 백화점에 가 아이 내복까지 한 벌 사다 건넸다. 그뿐인가 누가 그에 대해 물어오면 안 해도 될 칭찬까지 늘어지게 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는 이조직에 합류한 순간부터 나를 싫어했다는 걸, 단지 내 앞에서는 사회생활하느라 티를 안 냈던 것뿐이었다는 걸, 한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속도 없이 그를 끝까지 좋게만 생각했다.


하여 이들과 함께 일 할 때는 전과 다르게 나는 고개 처박고 일만 했다. 전처럼 소리 내어 웃지도 않았고, 농담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매일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고 하루하루 주어진 일만 했다. 그러고 보니 사람 마음 참 간사했다. 내가 남을 미워할 땐 모르겠더니, 정작 내가 남들에게 미움을 받고 보니 어찌나 힘들던지, 이게 진짜 보통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한 팀에서 이렇게 서로 대치를 하고 있으니 어떤 업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서로 두어 마디 대화만 해도 해결할 일도 노상 일을 어렵게 하기 일 수였다.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중간에서 애꿎은 팀장님만 피해를 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이런 연유에서 팀장님께서 술 한잔 하며 풀라고 지난번 회식자리를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건 내 입장에서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하여 회식 후 얼마 안가 나는 팀장님께 말씀드렸다. "죄송한데, 저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도저히 이 사람들과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냥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그러자 팀장님께서 잠깐 골똘히 생각하시더니, 감사하게도, 화난다고 그 나이에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면 어쩌려고 그러냐, 앞으로 나도 너한테 사람들하고 사이좋게 지내라 강요하지 않을 테니, 그냥 조금만 더 참고 다녀라.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감사하다. 나 때문에 중간에서 누구보다 힘드셨을 텐데 말이다.


다른 말이지만, 사실 내겐 남다른 재능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내가 '마음만 먹으면' 타인의 마음을 제법 잘 읽어 낸다는 거 다. 한데 이 능력이 생긴 배경이 조금 슬퍼서 나는 여태 이 일을 부끄러워했으면 부끄러워했지 자랑스럽게 여긴 적 없다. 왜냐면 이 재능은 바로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당하며 생긴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어린 나이에 비 상식적인 폭력에 휘둘리며 자랐고,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매일같이 가해자의 기분을 살펴야 했기에, 어느 순간 분위기 파악 잘하고, 남의 마음을 잘 읽는 능력이 생긴 거였다.


한데 말이다. 남의 눈치를 보고 산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하여 나는 평소에 대부분 이 센서를 끄고 지낸다. 해서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게 타인의 일에 무심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권력자를 향해서는 나도 모르게 이쪽 센서에 불이 켜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사는 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이러는 거다. 뭘 따로 계산하고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나는 이날 이때까지 자의가 됐든 타의가 됐든, 언제 어디서나 노상 최고 권력자의 편애를 받으면 살았다. 한데 참 사람일 알 수 없지, 결국 이 재능은 항상 내게 독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렇지 않은가 '선생님이 예뻐하는 학생, 부모님이 편애하는 딸, 상사가 끼고도는 부하직원 이게 말이 좋지, 권력자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언제나 또래 집단에게 린치를 당해야 하는 자리니까 말이다. 그래서 였을까, 사람들은 종종 나를 미워했다. 회사 사람들도 그랬다. 모르겠다. 어쩌면 이들에게 나를 미워해야 마땅한 이유가 더 있는지도, 해서 처음엔 그들 마음 바꿔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미워했다. 하긴 나부터도 그렇다. 좋아하던 사람 미워하는 건 쉬워도, 미워하던 사람을 다시 좋아하는 건 보통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이 나를 미워했던 이유가 엄청나게 대단한데 있는 거 같지 않다. (나보다 나쁜 놈도 많기만 하던데) 그냥 권력자들이 편애하는 자리에 내가 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렇잖아, 그 자리는 원래 공부를 잘해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자기들 차지였는데, 감히 나처럼 족보도 없는 애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 싫기도 했겠지,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이 나를 싫어했던 이유도 그리 대단한 거 같지 않다. 어쩌면 단지 내가 재수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사고 친 거에 대해 내가 잘했다고 하는 건 아니다. 그 얘기와는 별개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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