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모가 말했다. "어떤 집의 진짜 사정은 현관문 열고 들어가 봐야 아는 거야. 대문만 봐서는 모르는 거야". 맞는 말이다. 사람 사는 거 겉만 봐서 모르는 거니까. 회사도 마찬가지다. 간판은 그저 간판일 뿐이다. 내가 다니던 직장도 시멘트로 지어진 정글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옷을 잘 갖춰 입고 있을 뿐,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룰이 살아있는 아프리카의 초원과 뭐 하나 다를 게 없었다. 하긴 사람 사는 곳, 어디라고 만만하겠는가. 한데 대기업도 겉 보기만 그럴싸하지, 이 안에서 버티는 건 그리 멋있는 얘기는 아니다.
일단 이곳은 좋게 말해 엘리트 집단, 나쁘게 말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 절대다수가 공존하는 곳이다. 그러니 분위기가 어떨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배려와 양보를 모른다. 또 지나치게 서로 경쟁한다. 아마 나는 이곳이 아니었다면 다 큰 어른들, 특히 남자들이 서로를 이토록 질투하며 사는 줄 꿈에도 몰랐을 거다. 게다가 이들은 승부욕도 대단해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 진짜 별의별 짓을 다하는데, 도저히 어른들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리만큼 유치한 짓도 서슴없이 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인간관계를 단박에 박살 낼 수 있는 삼종 세트. 악의적인 모함, 고자질, 이간질 같은 치트키도 이들은 주저 않고 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수없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학급에서 벌어지는 패권 다툼과 부정부패, 그것이 몹시도 이 조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줄거리: 자유당 정권 시절,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해 온 병태(소년 병태 고정일)는 그 학교 5학년 2반 아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엄석대(홍경인)를 만난다. 만년 반장 엄석대를 추종하는 반 아이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받게 된 병태는 석대를 이겨야만 모든 상황이 극복될 것을 알고 서울에서 온 모범생답게 석대에게 맞선다. 그러나 석대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담임선생(신구) 때문에 그의 저항은 무기력해질 뿐 석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병태는 결국 석대에게 굴복하고 그의 총애를 받는 이인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새로운 담임인 김정원 선생(최민식)이 부임하면서 모든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김 선생은 아이들에게 정직, 진실, 용기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석대의 위치도 눈치채게 된다. 석대도 김 선생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느끼지만 자신의 입지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한편 선생은 수년간 전교 1등을 해온 석대의 성적이 다른 아이들이 시험을 대신 치러준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석대를 비롯하여한 아이들을 처벌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그동안의 석대의 비행을 늘어놓지만 병태는 끝내 입을 다문다. 아이들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낀 석대는 그 길로 학교를 뛰쳐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다. 병태도 다시 서울로 전학한다.
엄석대가 통치하는 5학년 2반의 풍경은 이곳 상황과 비슷하다. 극에 나오는 사람들의 호칭만 이사장(회장), 학교장(사장), 선생(본부장), 반장(팀장) 그리고 엄석대(스스로 차기 본부장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 엄석대 일당(엄석대를 중심으로 뭉쳐진 사내 정치세력)으로 바꾸면 다를 게 없다. 단 하나, 영화의 엄석대와 현실의 엄석대가 다른 건, 현실의 엄석대가 처벌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 엄석대는 전보다 더 교묘해져 쉽게 꼬리 잡히지 않는다. 또 현실에서 엄석대는 대개 승승장구하고, 엄석대를 따르는 무리들은 엄석대와 함께 동반 성장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이 회사를 졸업하곤 한다.
극 중에서 모범생답게 엄석대에게 맞서는 병태란 인물이 있다. 현실에서의 병태는 아마 얼마 가지 않아 정신이상에 걸리거나, 저 스스로 학교를 그만뒀을 거다.
한 번은 보고서를 쓰는데 담당 임원이 제품 출시 후, 3년 예상 매출 숫자에 무조건 곱하기 3을 하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그러냐 하니까, 하라면 하는 거지 말이 많단다. "근거는요?" 하고 물으니, 근거는 지금부터 찾으면 되지(네가)라고 하더니, 유난 떨지 말란다.
또 언제는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의 샘플이 엉망으로 나온 적 있다. 당장 위에 보고는 해야 하고 시제품 상태는 엉망이고,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그러자 보고 당일, 그는 우리 제품을 타사 제품으로 바꿔치기하라고 했다. 어쩌려고 그러냐니까, 우리도 나중에 이렇게 똑같이 만들면 된단다. 무리해서라도 가능성을 보여줘야, 이다음에 기회가 있는 거란다. 뭘 알고나 따지란다. 그렇다. 그는 계속 선생님을 속이는 대기업의 엄석대였다.
한데 현실의 엄석대들이 좀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의 밥상을 뺏어오는 덴 선수지만 정작 훔쳐온 밥을 제대로 떠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여태 남의 밥그릇 뺏어오는데만 눈이 멀어, 그간 밥을 어떻게 떠먹었는지조차 잊은 듯 보인다. 해서 이들은 기껏 남이 차려놓은 밥상 가져다 엎어버리기 일쑤다.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 이래서 있나 싶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석대는 선생님 앞에서 항상 처신을 잘하기에, 선생님은 이들은 "고작" 밥상을 엎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처벌하지 않는다. 오히려 풀 죽은 엄석대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내자식이 그깟 일로 고개 숙일 일이냐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나는 앞서 말한 거짓 보고서 사건 이후,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기 시작했다 그간 내가 만든 자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수백 억짜리 투자제안서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해서 그 일로 몇 날 며칠을 혼자 속을 앓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혼자라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본사로 달려가, 그 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사실대로 실토했다. 여태까지 보고한 건 다 거짓이라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그러자 이분들 중 한 분 께서, 내 증언의 진위 여부와 사실관계를 따로 확인한 후, 그 자리에서 엄석대 일당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호통쳤다. "당신 기술자야. 당신 엔지니어라고, 엔지니어가 거짓말을 하면 돼?"
그 후로 다행히 해당 프로젝트는 중단됐는데, 그날 이후로 불안감이 증폭되어 한 동안 나는 수면제를 두 봉씩 뜯고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대기업에서 엄석대가 이끄는 조직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엄석대 조직엔 상명하복이 존재하니,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직 내에 부도덕과 불합리가 판을 치는데 어떤 미친놈이 이 와중에 성과를 내겠으며, 그런 조직에서 누가 열심히 일하고 싶겠는가, 하여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 아주 특별한 이유로 회사에 애정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 빼고는 하나 둘 조직을 이탈한다. 그렇다. 재주 있는 곰들은 요령껏 움직인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요즘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말한다. "요새는 공무원도 이렇게 일 안 해요. 대기업이나 그렇게 일하죠"
최근에 친구의 학교 후배가 이 회사에 입사했다. 그녀는 이 회사보다 인지도도 높고 페이도 높은 다른 경쟁사에도 동시에 붙었는데, 최종적으로 이 회사를 선택했다. 이유를 물으니. " 이쪽 업계가 야근도 많고 힘든데 그 회사는 힘들지 않대요, 공무원보다 낫다고 하더라고요. 저한테는 워라벨이 중요하거든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전에 한 적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 어쩌면 이렇게 회사 와서 놀려고, 그간 열심히 공부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 해서 자꾸 뭘 새로 해보자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싫은 걸까 하는 생각.
이 조직에 20년쯤 몸담은 동안 나는 여러 형태의 엄석대들을 만났다. 한데 뜻밖에도 대기업 엄석대들의 특징은 생각보다 분명했다. 대부분 의외로 멍청했으며, 다들 무리 지어 다녔다. 당연하다. 실력 있는 자객은 혼자 다닌다. 두려운 게 없으니 몰려다닐 필요없다.
또 이들은 일도 직접 하지 않으며 괜히 일 열심히 하는 애들한테 걸핏하면 시비를 건다. 이런 식이다. " 너 윤리경영 들었냐?" (온라인 수업이다) " 예 들었습니다" " 할 일 없구나" (다 같이 박장대소) , 그다음 " 너 보안교육 들었냐?" " 아직 안 들었습니다" " 일도 안 하면서, 그것도 안 듣고 뭐 했냐" (다 같이 박장대소)
그런데 말이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었던 건, 내가 보기엔 당시 그 팀에서 이 친구만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 이 친구랑 당시에 나랑 고객사 대응 한 번 한 적 있는데, 둘 다 새벽 5시에 출근 해 자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이런 이유로 엄석대들이 이 친구를 그렇게 괴롭혔던 건지도 모르겠다. 다 같이 일을 안 해야 티가 안 나는데, 이 친구 혼자 자꾸 일을 하니까 못마땅해서 말이다.
언젠가 나도 우리 팀 B와 (날 무시했다던) 경쟁 피티를 한 적 있다. 시킨 사람은 경쟁시키려는 의도가 없었겠지만 둘 다 관계가 관계인지라, 묘하게 신경전이 있었다. 그도 아마 발표 자료를 만들 때만 해도 내심 자신이 있었을 거다. (내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도 모르는 데다) 그 역시 나름 수년간 이런저런 기술 자료를 만들어 왔기에, 다른 건 몰라도 기술자료는 나보다 잘 만들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 기술 자료는 당연히 공대 출신인 B 가 잘 만든다. 한데 당시엔 신사업의 특성상 엇비슷한 기술 자료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 감각적인 슬라이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해서 최종에서는 모션그래픽이 포함된 내 자료가 채택됐다. 그래서 였는지 어째서였는지, 그는 그날 종일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이 일로 나는 또다시 엄석대 일당의 심기를 건드렸다. 왜 아니겠는가 이 조직의 엄석대들은 나처럼 아무 연고 없는 애를 싫어한다. 당연히 B가 좋다. 한 다리만 건너면 그들은 전부 학교 선 후배로 동향으로 얽혀있으니 말이다.
한데 말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은 나를 대상으로 싸우면서도 끝까지 나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나는 애초에 이 싸움을 이기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온 힘을 다 해 일 년 간 진흙탕에서 함께 굴러주면, 이들이 나 다음에 다른 누구를 괴롭힐 땐 적어도 최소한 고민이란 걸 한 번 해 볼 것 같아 그랬던 거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