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든,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려면 일단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섣불리 입을 뗐다가는 "너나 잘하세요" 같은 소리 듣기 십상이다. 이건 서너 살짜리 꼬마들도 아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절대로 저보다 못한 사람 말은 듣지 않는다. 줘 터지는 한이 있어도 저보다 나은 사람하고 놀려고 기를 쓴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거다. 배울 게 없는 사람과 노는 것만큼 피곤한 게 세상에 없다는 걸.
조직에서도 그렇다. 남을 가르치려면, 그에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아니, 자격이라기보다 뭐가 됐든 남보다 나은 게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자리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아, 잠깐은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왕도 거지도 누구나 잠깐은 하니까.
여태 조직생활을 하며 나는 수많은 리더들을 봐 왔고, 이들을 통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건 바로, 실체가 없는 존재를 사람들이 귀신같이 알아본다는 거다. 신기하게도 제대로 된 실력 없이 연차 때문에 혹은 사내정치로 자리를 꿰차고 오른 사람 근처엔 사람들이 잘 꼬이지 않았다. 신입사원들도 이들은 귀신같이 알고 피한다. 아 몇몇이 잠깐은 놀아줄 수 있다. 누구나 잠깐은 친구도 될 수 있는 거니까.
조직에 있는 나쁜 리더들의 특징은 여러모로 비슷비슷하다. 그들은 실무 자리에서 제대로 일해 본 적 없어 일을 잘 모른다. 실무를 모르다 보니 의사 결정해야 할 때 자꾸 딴 소리를 하고, 상황 판단을 잘하지 못하니, 일을 뭉개거나 혹은 무조건 밀어붙이기만 한다. 그럼 실무 회의 때 실무자들이 알아듣게끔 이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다. 성질부터 낸다. 그러고는 아랫사람을 감정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다. 태도가 어쩌니 인성이 어쩌니 하면서, 자기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 자꾸 아랫사람한테 힘으로 보여줘야 하니까, 그래야 애들이 자기 말을 들을 거 같으니까.
그래, 뭐 좋다. 남의 돈 버는 거, 어차피 치사한 거니까, 하며 그럭저럭 참아본다. 중요한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다. 이들은 꼭 한바탕 화를 낸 후, 함께 술 한 잔 마시러 가자고 한다. 그렇다. 안에서는 무섭지만 밖에서는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거다. 한데 이쯤 되면 실무자들은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뛰고 싶다. 아니 그렇지 않은가, 낮에 시달린 것만으로도 충분해, 집으로 곧장 달려가 그냥 누워버리고 싶은데, 술까지 마시라니, 한데 또 안 가면 삐지니까 억지로 자리에 가 앉는다. 그러면 이들은 또 눈치 없이 술잔에 술을 꽉꽉 채워주며, 낮에 있었던 일 같은 거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잊으라 하며, 자기는 생각보다 쿨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후로는 자신이 이 조직에 어떻게 헌신해 왔는지 일장 연설을 한다. 밤이 늦도록 말이다.
이런 일을 한 두 번 겪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다음 실무 회의에서, 그가 봄 다음 계절이 겨울이라 해도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는다. 그러면 회의는 그 리더의 마음에 흡족하게 끝나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제품의 운명은,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되고 마는 거다.
솔직히 말해서 좋다. 여기까지도 양보하라면 하겠다. 이런 사람 부서에 한 두 명 있는 거, 그가 과장이 됐든 팀장이 됐든 상관없다. 나머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 사람에게 정보를 덜 주고, 걸러내면서 일하면 되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줄을 잘 서서 자꾸만 높은 데로 올라간다는데 있다. 그러면 이들에게 진짜 일을 크게 망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그때부터 조직의 운명은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날들이 시작되는 거다. 사실 겉에서 보기에 잎이 푸르면, 시커멓게 썩은 뿌리를 찾아낼 도리가 없다. 안다. 그러니 매년 감사를 하고, 비리 근절 캠페인을 해도 문제의 근원을 찾기 어렵겠지, 기어이 나무가 썩어 문드러져야 보이겠지, 한데 말이다. 이럴 때마다 참으로 묘하게 일을 그렇게까지 망친 장본인들은 이미 그 판에 없다는 거다. 엉뚱하게 나무가 쓰러지기 직전에 그 나무를 넘겨받은 사람들이 꼭 독박을 쓴다.
그러니 다들 무슨 일이 됐든, 일단 책임지지 않으려 애쓰는 거다. 자 그럼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다들 자신이 관리하는 나무가 잘 자라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맡은 나무가 자기 손에서 죽지 않기만을 바라는 거다. 그럼 당연한 얘기지만 이 조직의 나무들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무는 거다. 다른 집 나무들이 푸르르게 숲을 이뤄도 아랑곳없이 말이다.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는 위의 얘기와 결이 다르지만 같은 맥락의 사례라, 말하려 한다. 사내에서 어떤 팀장과 그 바로 밑의 과장이 사귀기 시작했다. 둘 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일은 처음에 그쪽 팀장이 자기 애인에게 3년 내리 연속으로 고과 S를 주면서 시작됐다. 물론 실제로 그녀의 애인이 압도적으로 일을 잘했을 수 있다. 하지만 팀 내 평가는 달랐다. 게다가 인사고과라는 시스템이라는 게 한 팀에서 S가 한 명 나오면 반드시 C가 한 명 나와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말이 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해당 팀장이 자꾸만 온갖 공적조서를 꾸며, 그에게 S를 준다고 말이다.
처음엔 나도 설마 했다. 아직도 남녀가 함께 출장을 간다고 저런 소리를 하다니, 하지만 이 일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둘의 연애를 증명할 증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그 후로 내겐 말 못 할 고민이 생겼다. 문제의 팀장과 내가 개인적으로 친하다면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뭐나 된다고 이들에게 충고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 대해 말해 주는 게 도리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나는 그 팀장에게 밥을 먹자고 한 뒤, 용기 내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내에 이런 이런 얘기가 돕니다. 솔직히 저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두 분이서 출장 가는 건 자제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공장 근처에서 두 분이 저녁에 밥 먹는 걸 봐도,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 하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그러자 팀장은 내 얘기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며 " 참 사람들 할 일 없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남 얘기나 하고 다니는구나" 하고는 밥도 다 먹지도 않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후로도 계속 그들은 함께 출장을 갔다. 대신 이번엔 알리바이용으로 업무와 상관없는 팀원들을 하나씩 끼워서 갔고, 정작 출장지에 도착하면 데리고 간 팀원은 공장 구석에 처박아 두고 매일 밤 둘이서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이 일에 대해 사람들이 자꾸 외부에 말하고 다녔고, 그러면서 다시 사내에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들은 데이트 무대를 숫제 국내에서 해외로 옮기더니, 그때부터 그 팀장은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당시 이들은 회사에서 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기에 그녀가 해외로 출장 가야 하는 당위성을 만들어 위에 보고하면, 윗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그들을 계속 출장 보내줬다. 그렇다면, 아마 다들 이쯤에서 궁금할 거다. 출장을 승인해 주는 사람들은 바보냐고.
아니, 내가 보니까 작정하고 속이면 별 수 없다. 부하직원의 은밀한 속 사정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같은 팀 사람들이, 그들의 불륜이 사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알렸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글쎄. 그게 또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물론 당시 해당 팀원들은 몹시 괴로워했다. 하나 둘 다 조직 생활과 별개로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그 누구도 이 사실에 대해 어디서도 섣불리 말하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이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망했다. 차라리 여기까지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그 후로 팀 프로젝트가 잘 안 된 이유에 대해 당시 참여했던 팀원들 탓을 했다. 애초에 일을 열심히 하려는 의지도 잘할 능력도 없는 애들하고 일을 해서 프로젝트를 망쳤다고, 그런 애들하고는 천하의 스티브 잡스라도 뭘 못해 볼 거라고, 덕분에 그들 밑에 있었던 주임, 대리들은 함께 일하면 안 되는 애들이라고 사내에 낙인이 찍혔다.
물론 유연성이 있고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조직은 모르겠지만 관료주의에 물든 큰 조직에선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과 직접 소통하기 힘들다. 그러니 중간 관리자가 말하는 대로 평가할 수밖에. 능력 있는 녀석들은 어떻게든 헤쳐 나온다고? 물론, 정말로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대기업이란 조직 속에서 20년째 있는 내 입장에선, 한 번 낙인이 찍히면 그 낙인을 지우기는 정말 힘들다 말하고 싶다.
결국, 그 팀의 팀원들은 한 곳에서 커리어를 지속적으로 쌓으며 일을 배우지 못하고, 여러 부서를 전전하는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해가 있을까 짚고 한 가지 가자면 나는 지금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과 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 역시 모른다. 먼 훗날 내가 어떻게 망가질지. 다만 사생활, 특히 불륜이란 요소가 업무에 섞이기 시작하면, 특히 리더가 그러면 의도야 어쨌든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거뿐이다.
일이 잘못되면 당사자에겐 사랑 때문에 힘든 날이 오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다른 직원들은 그 사랑 때문에 생계가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