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 대단한 너

by 산만언니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가라 데이터 조작 지시) 임원과 일당은 결국 다른 비리가 발각되어 끝내 해고당했다. 나는 그전에 TF에서 빠져나와, 아니, 애초에 그런 일들을 해낼 깜냥이 못되기에, 그 후 일어난 징계의 파편을 피했다. 하지만 그 일은 내게 감정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내상을 입혔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스스로 내가 생각보다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평소에 나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 불한당을 보면 누구보다 먼저 그 심장에 날 선 칼을 찔러 넣을 줄 알았다. 한데 웬걸, 알고 보니 나도 권력자가 하라면 하는 사람, 소위 말해 까라면 까는 인간이었다. 그렇다. 나 역시 먹고사는 일 앞에서는 가치관이니 신념이니 어째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아팠다.


내가 이 일을 두고 여전히 마음 쓰는 건, 그때 저들의 잘못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 보다 적극적으로 비리를 폭로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남아서다. 그랬다면 조직에 끼친 피해 규모를, 피해자의 수를 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이 들 때문에 애먼 사람들이 줄줄이 관리감독 소홀로 징계받는 걸 봤을 땐 정말이지 괴로웠다)


그 무렵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그때 나는 그룹 계열사 언저리에 다니는 여자 대리와 함께 일했는데, 그녀는 우리가 추진하려는 신규 사업 분야에 경력이 있어 급하게 그룹 프로젝트 팀에 합류했던 친구였다. 그 때문에 TF 내 그녀의 입지와 말에 무게가 실리던 참이었다.


어느 날 나는 이 친구와 함께 우리가 출시하려는 제품의 위탁 생산업체를 방문하게 됐다. 제품이 예상보다 더디 만들어져 확인차 현장에 갔는데, 막상 두 눈으로 제조 공정을 확인하니 이게 책상머리에 앉아 무조건 재촉해서만 될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자 연세가 지긋하신 공장장께서 나와 잘못한 것도 없으신데 연신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죄송하다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양손을 마주 잡고 비비고 있는데, 그녀가 대뜸 공장장님께 "이 보세요. 여기 ㅁㅁ에요. 대기업이라고요. 지금 저희 앞에서 안 된다는 소리가 나와요?"라고 했다.


그 얘기에 정신이 번쩍 난 나는 그녀 말을 얼른 자르고 들어가 사태를 수습했다. "공장장님. 무리한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떤 회사 앞에서는 을입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날짜 던지고 무조건 해오라고 하지요. 공장장님 마음 이해합니다. 저희 쪽에서 좀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여자애를 데리고 나와 이렇게 타일렀다. "세상에나, 우리가 구글에 다니니, 애플에 다니니, 아니지, 그런데 다닌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지, 그러는 거 아니다. 앞으로 어디 가서도 그러지 마라" 그러자 내 얘기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입을 삐쭉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다. 남이야 그녀의 거짓말로 곤란하던 말던, 그녀는 정말 닥치는 대로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 본인의 집안, 출신학교까지 교묘한 방식으로 거짓말했다. 한데 문제는 또 내가 심각하게 거짓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거다. 평소에도 나는 불분명하게 말하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뭐든 적당히 대충 하고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도 싫고, 무슨 일이 됐건 상호 간에 오해의 여지없게 미리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게 좋다. 해서 그녀와 나는 일하는 내내 트러블을 일으켰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는 나대로 그녀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 했고, 그녀는 그녀대로 나 때문에 나자빠졌다. 그러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박힌 돌이었던 내가 그 프로젝트에서 쫓겨나고 굴러온 돌인 그녀가 자리에 남았다.


그 후로도 그녀는 어지간히 내가 싫었던지, 그룹 관계자들에게 나에 대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질스러운 말들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흠집 내기에 장단 맞춰 줄 생각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보니, 아무리 내가 동그라미를 가지고 있어도 남들이 그걸 세모라고 하면, 그 동그라미는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세모로 통했다. 아무도 내게 갖고 있는 동그라미 좀 보자, 하며 확인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에 관심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3년 동안 열심히 했던 TF 일을 어느 날 갑자기 한마디 말도 없이 그만두게 되었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그녀는 삼십 대 초반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온갖 보석과 명품을 휘감고 뚜껑이 열리는 스포츠카를 몰고 다녔고, 틈틈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이용해 자신의 인맥과 부를 과시했다.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한 밤에 타워팰리스 사진을 찍어 올리고 "#시댁 가는 길"이라고 해시태그를 다는 것. 이런 그녀의 쇼에 세상 물정 모르는 우리 모범생들은 다들 깜빡 속아 넘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녀는 숫제 자신이 대한민국 상위 1프로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인 듯 행세하며, 언제라도 자신의 대단한 인맥을 이용하면 이 회사 제품 하나 정도 시장에 띄우는 건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굴었다. 물론 이후에 드러났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돈도 능력도 재능도 인맥까지도.


한데 우리 쪽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그녀의 뻔한 거짓말에 다들 속아 넘어갔다. 돈도 많고 능력도 출중한 데다 예쁘장한 직원이라니, 그러자 당시 계열사 사장은 진짜 미쳐서 늘그막에 애첩을 본 노망난 노인네처럼 그녀의 머리 위로 돈다발까지 퍼부었다. 이렇게 사장을 든든한 빽으로 두었으니 그녀가 회사에서 못할 일은 없었다. 심지어 당시 사장은 거래하는 업체를 통해 회사 돈을 빼돌려 그녀에게 따로 더 많은 연봉을 챙겨주더니 급기야 일 년 뒤에 그는 그녀를 대리에서 팀장까지 특진시켰다.


그 후로 그녀는 능력도 재능도 없는 데다 양심마저 없어 남이 만들어 놓은 제품을 사다가 버젓이 라벨 갈이를 해 마치 자신이 제품을 개발한 척했고, 뒤로는 생산업체를 통해 백 마진(커미션)까지 챙겼다. 또 물량은 어떻게 확보했는지 자신의 SNS 계정에서 따로 그 제품을 현금받고 팔았다. 그뿐인가 중간 재료상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물품 대금도 갚지 않아, 그쪽 업계에 우리 회사 이미지만 심각하게 망가트렸다. (다른 업체 실무자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또 그녀는 회사에서 어마어마한 홍보비까지 챙겨 제품 홍보를 핑계로 중국과 홍콩에도 진출했다. 그녀 말로는 해당 제품이 나오기 전에 선주문을 받아 광고 홍보로 투자한 금액을 이미 회수했다고 했는데, 글쎄 그 말이 사실이었을까?


아무튼 영원할 것 같던 그녀의 사기 행각도 문제의 사장이 퇴임하자 하나 둘 탄로 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회사에서 종적을 감췄다.


나중에 그쪽 지인을 통해 들으니, 그녀는 이뿐만 아니라 그녀는 연말에 백화점 행사 지원 나간다는 명목으로 해당 팀 5명의 유니폼을 500만 원씩 총 2천500만 원으로 기안을 올린 후, 그 돈 까지 따로 챙겼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나는 그녀를 끝까지 의심하고 추궁한 덕에, 그녀에게 우리 회삿돈은 1원짜리 한 장 그녀의 주머니로 넘기지 않았지만 (삼성을 예로 들면, 삼성전자, 삼성전기 다 다르듯, 그녀와 나는 소속된 회사가 다르다) 그 계열사는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결국 회사 자체가 없어지고 다른 계열사로 흡수 통합되고 말았다.


물론 그녀에게 속지 않고, 추궁한 덕분에 리스크를 피해 갔다고, 회사에선 아무도 날 알아주진 않았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한데 문제는 그녀를 전폭적으로 밀어준 문제의 사장 때문에 회사를 열심히 다니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 직장을 잃었다는 데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 바보 같은 일들을, 사장이 속고 있다는 걸, 그녀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몰랐을까. 아니, 나는 아니라고 본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일에 엮여 곤란해지고 싶지 않으니,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렇다.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혼자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 있거나 드러나면 혼자 한 것처럼 꼬리를 자를 뿐. 일이 크게 망가지려면 모두가 조금씩 나쁘게 굴어야 가능한 법이다.

keyword
이전 04화4. 직장의 일그러진 엘리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