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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mi Lee Nov 07. 2024

아직이야

신갈나무

가을은 짧다. 이제 우리나라 계절은 여름과 겨울뿐이라 말하는 세상이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 그리고 더 혹독한 겨울이 올 것이라는데, 그 사이 다채로운 색을 담당하는 봄, 가을은 설자리가 점점 좁아진다는 말 같아 마음이 바쁘다. 이 글도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며, 벌써 철 지난 글이 됐다. 이럴 때는 아주 느긋하게, 그럼 다시 오는 내년을 대비하자!라고 생각의 방향을 틀어버리는 게 더 현명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도 마음은 유연성이 부족하다. 혹은 내년 이맘때까지 기다릴 인내가 없다. 아직 생생하게 그날의 햇살과 냄새가 떠오를 때, 써서 남겨야한다.

마음 바쁘게 가을을 잡으러 산에 간 날이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그날도 여전히 가을은 아직이라고 말했다. 노랗게 빨갛게 아직 덜 물 든 나무들. 바닥에 몇 개 떨어진 나뭇잎도 여전히 도톰한 초록이었다. 늦게 까지 높은 기온이 이어지며, 찬바람은 느리게 오고 있었다. 산책과 계절을 떠올리며 떨어진 나뭇잎을 골랐다. 기왕이면 예쁜 것을 가져가려고 여러 번 살폈는데, 병든 잎이 먼저 떨어지는 것인지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좀 더 나은 다른 잎을 발견하면, 들고 있던 나뭇잎은 멀리멀리 던저버렸는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지만, 역시 버리는 것은 어색했다. 그럼에도 더 힘차게 날려 보았다. 더 멀리 떨어지길 바라며, 팔랑팔랑 얼마 가지 못하고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딸아이와 더 예쁜 나뭇잎을 고르는 것도 모두 즐거웠다.

온전한 갈색잎이 없으니, 기왕이면 깨끗한 초록잎을 고르려 애썼다. 여전히 초록인 잎을 바라보다 불현듯 나만 또 바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을 맞이하는 지금, 내 시계는 또 자연의 시계와 맞지 않고 혼자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산은 아직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했다. 앞서가던 마음이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며, 산의 시계에 맞아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온전히 동기화되는 순간은 공기 속에 있을 때, 코끝에 바람을 들이켤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구나. 조급해할 것 없어. 아직은 가을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알지. 부지런히 찾아다니지 않으면 금세 이 가을은 떠나고 말 것이라는 것을. 하루하루 이제 바람이 차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날씨. 아침, 점심, 오후, 저녁이 또 다른 날씨, 어제와 다른 옷, 하루 안에서도 달라지는 옷의 온도. 추울 땐 뜨끈한 게 좋고, 더울 땐 시원한 얼음이 좋지만, 이 감촉은 살아있음이다. 대지는 제 속도로 변해간다. 나를 기다려주지도 않고, 기다린다고 빨리 달려오지도 않는다. 그 변화를 더 자주 보려면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이제 11월, 수고한 나뭇잎들이 작별한다. 포근히 땅을 덮으려 떨어지지만, 그 순간을 놓치면 또 누군가는 열심히 쓸어 거리를 가꾼다. 옷을 여매고, 좀 더 도톰한 옷을 꺼내고, 눈에 담으러 나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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