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목사님들
<그림 ,바다새블로거님의 3D그림>
*지난회 <내가 만난 영적 선배님들 上> 계속편 입니다
3.J목사님.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예배드린 교회의 분위기
주일은 경건하게, 물론 사는 것도 파는 것도 자제.
예배는 조용히.
그런 교회의 분위기에 익숙한 우리 가족.
그런데 어쩌다
귀신을 쫓는 축사, 안수로 병치유.
손뼉 치며 찬양한다든지 통성기도시간 여기저기 큰소리로 방언하고 아멘! 소리가 끊이지 않는 J목사님이 시무하는 이웃교회의 새벽, 심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보통 때는 본 교회예배 참석.
그때 나는 퇴원 후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새벽예배와 금요심야예배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케 된 것이다.
침례교 J목사님과의 만남은 특별했다.
그분과의 만남은 아들로 인해서다.
지금 그분은 전국구 유명 부흥회 목사님.
그때는 개척교회를 하시며 남편 직장의 신우회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신우회 회원이던 남편이 특별한 아들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안수기도로 치유해 보자고 연락을 하신 것.
어느 금요일, 철야기도를 마치고 12시경 우리 집 거실에서 시작된 안수기도회는 새벽예배 시작 전인 너덧시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아들을 위해 참석하기 시작한 새벽예배 철야예배.
어느 틈에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아들의 치유를 위해 시작된 기도가 이젠 중보기도. 감사기도로 바뀌었다.
얌전하고 수줍던 내 성격이 담대해졌다.
한 계절을 그렇게 지내다가 이젠 본 교회의 모든 예배를 참석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J목사님은 내 신앙의 파토스를 깨워주신 분.
얼마나 감사한가!
3. L목사님
1989년, 남편이 일 년간 미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가족이 함께 가야 하나?
출석할 수 있는 한인교회는 있으려나...
초등3학년 딸애의 학교문제, 무엇보다 장애인인 아들의 학교는 어떻게 되려나...
남편이 보름 먼저 출국했는데 다행히 좋은 교회가 가까이 있단다.
남은 가족도 마저 도착한 다음날
'그 교회'에서의 새벽 예배.
정식 예배는 아니다.
어둑어둑한 시간, 넓고 쾌적하고 카펫 깔린 예배당 여기저기서 교인들이 의자에서 혹은 바닥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
목사님은 회중석 뒤쪽 공간에서 손 들고 기도하고 계신다.
그 새벽시간이 계속되면서 지나온 나의 인생이 해석이 되고 정리가 되었다.
잠들다 깊은 밤, 눈물로 깨곤 했는데 어느 날 '잠 결에 찬양하더라'는 남편의 말.
기도하면 감사의 눈물이.
(평생 그렇게 눈물콧물 흘리면서 기도할 줄 알았다.
'그 기간 한정 은혜')
일 년 체류 후 귀국했다.
반년 후 기대치 않게 그곳으로 다시 가 일 년간 살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그 교회.
처음 그곳에 갈 때의 소원은 명색이 영어전공이지만 영語에 약한 내가 정식으로 현지 어학원에 다니는 것
그건 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목사님은 주중에 있는 제자반훈련 두 군데를
참석하라 하신다.
기초반을 개설하시고 맡으라 하신다.
나는 이 참에 어학원을 다닐 건데요?
큰 도시가 아니면 교통이 불편한 미국.
운전을 못하면 꼼짝 못 하는
장애인이다.
1990년 나는 운전자가 아니었다.
어학원에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목사님은 제자훈련에 주 3회 참석하라 신다.
그렇게
인생은 내 뜻 아니게 흘러갔다.
미국 Assembly of God 교단.
주로 국제결혼한 백여 명의 성도들.
한두 시간의 거리의 Iowa에도 구역이 있다.
주중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낮 3개, 야간 1개
매월 2박 3일로 희망자들이 '헤브론 금식기도원에 '간다.
지난주 설교를 내 말로 다시 설교하는 시간도 있다.
금요일 심야예배 전, 아이들 한글교실과 성가대언습이 있다.
토요일에는 정식 새벽예배가 있는데 성도들이 돌아가며 설교를 맡는다.
매월 구역장회의는 토요일 새벽기도 후.
남편은 주일날 예배 전, 몇몇 분과 성경공부를 했다.
남편과 몇 분이 얇은 월간지 <예수사랑>을 발간하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목사님 댁에 모여 만들다 보면 한 달이 휙휙 지나갔다.
잡지는 원고 모으기가 관건이다.
목사님은 설득의 달란트가 많으셨다.
목사님의 독려로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이 원고를 쓰기 시작했고
나도 이런저런 간증문을 쓰기 시작했다.
한인가게에 뿌려진 <예수사랑>을 보고 유학생들과 이민자분들이 교회를 찾아왔다.
교회 프로그램에 바쁘게 참석하다 보니 어학원등록은 생각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귀국 후 신학교 문을 두드렸다.
비록 돈을 못 벌지만 1000가지 유익이 있는
Best choice였다!
나뿐 아니라 학위 받으러 온 유학생도 전문훈련을 받으러 온 직장인들도 L목사님의 회유와 독려로 목회자의 길을 가신 분들이 생겼다.
토요일이나 주일 예배 후, 목사님 댁에 우르르 몰려간다.
이민 오신 지 오래되신 목사님.
그 댁에서 미국의 문화도 접하고 어른들은 이런저런 신앙, 정치나 사회문제 토론을 하는 동안
애들은 디즈니 영화를 보거나 뒷마당에서 뛰어다니며 논다.
사모님의 냉동고 안에는 언제 가도 항상 쇠고기가 쌓여있었다.
야구장 단체관람.
놀이동산 야유회.
나이아가라 단체소풍.
2박 3일의 summer camp때의 찬양과 간증은 그 여름밤 별빛보다 빛났다.
귀국할 때마다 우리는 전 날, 이민가방들을 끌고 목사님 댁으로 갔고 목사님은 공항까지 라이드 해주시고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그 뒤 한국에 오실 때 수차례 우리 집에서 묵으시고 기도해 주셨다.
그 뒤 목사님은 뉴욕 한인신학교 학장을 맡으셨다.
30여 년 전 이야기.
우리 부부는
가진 것 없이 태어났고 아등바등 학교 다니고
집 하나 마련하느라고 십여 년이 걸렸다.
흙수저 출신.
그런데 특히 이번 영적선배님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
'나는 참으로 부자구나'
돈으로도 노력으로 되지 앉는 이런 귀한 분들을 만났구나...
참으로 감사해요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