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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인생 30년

감사한 관장님들

by 제이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아들.
여기저기 약하고 기형.
의사는 말했다.
"당분간 출생신고는 미루세요.
살아도 두 발로 서기는 하려나요..."

돌이 되고 두 살이 되고 세 살이 되어도 걷기는커녕 벽을 붙잡고 간신히 서는 정도.
방안을 기어만 다니니 바지 무릎만 닳아 천을 덧대고 덧댄다.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보였으니 그 꿈 이루게 하옵소서...'
찬송 부르는 나의 '꿈'은 아이가 걷는 것.
행여 걷더라도 이 애는 방 밖을 나가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창문 밖에서 뛰노는 애들을 부러워만 하겠지...

그러나 늦지만 아이는 자라기 시작했다.
걷기도 뛰기도 할 수 있었다.

아들보다 훨씬 상태가 나은 아들의 한 친구가 합기도 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아들도 운동이 가능할까?
길 건너 태권도 도장이 있었다.
어른인 나도 힘들 것 같은 태권도.
막상 도장에 가보니 유치원 꼬마들도 있다.
됐다!

덩치가 크시나 얼굴은 해맑으신 관장님께서 안내해 주셨다.
그리고 친절한 사모님.
학원차량이 있지만 학원이 집 근처라 걸어 다닐 수도 있다.
아이가 특수 중학교 입학식을 한
1996년 봄이었다.

구령에 맞추어 준비체조.
쩌렁쩌렁 울리는 기합소리.
태권도뿐 아니라 이런저런 운동도 한다.
아들은 방과 후 도장으로 갔다가 귀가해서 혼자 품새 연습을 재미있게 하기도 했다.

몇 달 뒤 학교에서 운동회가 있었다.
반에서도 비실비실해 보이는 아들.
그러나 장거리 달리기에서 1등.
태권도장에서의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
여름에는 한밤에 담력훈련도 있었다.
부모님 초청 공개수업도 있었다.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아들.
끈 맨 하얀 도복바지가 아래로 한 뼘 쳐져 있다. 에쿠.
송판 격파를 할 때는 주위 아이들이 일제히 긴장을 하며 이 '늙은 형님'의 손을 주시한다.
한 번에 격파!


흰 띠가 노란 띠가 되고 초록띠가 되었다.
국기원에서 시행하는 공개 승품 심사도 거쳤다.
그리고 블랙벨트!
심사 때는 외부 심사위원들이 사전에 아들이 장애인임을 알고 베네핏을 준 것 같지만 어쨌든.
장한 아들.
감사하신 관장님.


애를 학원에 데려다주는 김에 사무실에 가끔 들려 사모님과 차 한 잔.
창문 너머 어설프나 그래도 나름 열심히 따라 하는 아들이 보인다.

학원에서 운동도 운동이지만 예의범절도 신경 써서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도토리'인 아들이 애들 속에 섞여 잘 지냈다.
때때로 우리 가족과 관장님 부부와 식사도 같이하고
가을마다 관장님 고향에서 보내온 청도 반시를 박스째 맛보았다.
국제심판 자격까지 따신 석사 출신이시지만 붓글씨가 일품인 文人이셔서 철마다 성경 구절이나 휘호를 써주셨다.
엄마가 소년원 봉사를 할 때 일이다. 여름 겨울방학 때 며칠간 종일 수련회로 엄마가 낮에 집에 없다.
학원에 간 아들을 점심을 먹이면서 두 번 수업받게 하셨다.
세월이 지나면서 학부모가 아니라 대소사를 나누는 가족이 되었다.
관장님의 넉넉한 품에서 아들은 태권도도 사랑도 배웠다.
우리가 동네에서 이사를 가야 할 때, 길 건너 더 좋은 아파트가 있어도
태권도 학원 곁에 집을 구했다.

10년이 지나고 20여 년이 지났다.
언젠가부터 수강생들이 줄어들고 있다.
어느 날, 아들을 도장 안에 들여보내고 복도 신발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신발이 열 켤레 남짓만 있다.
가슴이 철렁.
도와주시던 사범님도 언젠가 그만두셨는데.
학령기 인구도 줄어들고
운동보다 공부에 올인하는 세태.
그리고 요즈음은 운동 목적보다 맞벌이 부모라 집에 가지 못하는 어린 학생들 시간 보내기 목적.
그러다 보니 젊은 관장들을 선호한단다.
그래 저래
공개수련 때는 백여 명이 넘는 아이들과 학부형들이
잔치 분위 기었던 때가 바로 엊그제였는데...

아들은 시 장애인 태권도 대회에서 상도 타고 나름 태권소년(청년)이 되어 태권도도 즐기며 뜀틀 구르기 같은 학교 체육도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태권도 도장은 문을 닫았다.
한동안 문 닫힌 학원을 지나칠 때는 가슴이 아팠다.
예전 운동할 때의 힘찬 구령 소리, 끝나고 쏟아져 나오던 아이들, 관장님 부부...
Those good days.




몇 달 운동을 쉬다가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집 근처 몇 군데가 있었는데 길 건너 있는 한 태권도장.
일단 전화.
"저 애가 다운증후군인데요 혹시 등록이 될까요?"
"좀 어렵겠는데요"
뜻밖의 거절을 당했다.
직접 찾아가 말해보리라.
그 학원을 찾아가는데 한 노란 학원 봉고차가 지나간다.
그 학원차는 길 건너 다른 편에 차를 주차한다.
거절당한 그 학원보다 차라리 저곳으로 가 볼까.
계획에 없던 새 학원.
"이런 다운증후군애를 맡은 적 있어요.
걱정 마세요.
정상아이들이 이런 애와 함께 지내는 것도 배워야 해요."
그렇게
아들은 좋은 관장님을 만나 다시 태권도를 하고 있다.

살아갈수록 귀한 것 두 개 - 신앙과 건강이다.
그중 하나인 건강을 책임지는 태권도를 아들이 배우면서 귀한 분들을 만났다.

나는 모자란 아들 덕분 아름다운 분들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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