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각자 바라는 미래의 소원들을 말했다.
첫 번째 올리브나무,
"나는 아름다운 보석 상자가 되고 싶어.
세상의 온갖 값진 보석을 한가득 담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니 얼마나 멋지냐고?"
둘째 자작나무,
"나는 왕을 태우는 커다랗고 멋진 위대한 배가 되고 싶어.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온 세상을 다닐 테니 정말 자랑스러울 거야"
세 번째 소나무도 꿈꾸듯 그의 소원을 드러내었다.
"나는 특별한 소망은 없어.
그냥 이 언덕 위에 평생 있으면서, 높이 자라서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좋으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게 내 꿈이야"
작열하는 낮의 태양과 바람을 맞으며
고요한 밤의 달빛과 별빛을 보며
때로는 몰아치는 폭풍과 추위를 겪으면서
세 나무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들은 그들의 꿈을 때때로 기억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목수가 첫 번째 나무를 베어갔다.
그 나무는 '드디어 내 꿈이 이루어지구나,
아름다운 보석 상자!'
그러나 그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더럽고 냄새나는 소 외양간의 여물통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이건 아니지. 초라한 자신을 보며 그는 의기소침해졌다.
꿈은 무슨...
두 번째 나무도 베어졌다.
그가 만들어진 것은 그의 꿈인 배는 맞다.
그러나 동네 어부들이 타고 다니는 비린내 나는 초라한 고기잡이배.
"하나님, 저가 기도했잖아요?
이게 뭡니까? 제 배에 태울 이는 왕이라고요. 이런 무식한 동네 어부들 이라니요..."
나무는 산산이 깨어진 그의 꿈을 슬퍼하며 어부를 싣고 바다로 나가며, 고달프고 찌질하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내 주제에 꿈은 무슨...
세 번째 나무.
베어 지지 않고 그곳에서 마냥 높이 서서, 사람들에게 고귀하게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리라는 그도, 어느 날 뚝딱 베어졌다. 통나무가 되어 나무토막이 가득 쌓인 곳에 던져졌다. 그 나무들은 악랄한 죄인들의 형틀로 쓰인단다.
이렇게 나는 끝나는구나...
여행 중인 한 젊은이와 출산을 앞둔 그의 아내가 여관방을 얻지 못했다.
급히 소 외양간에 들어와 아기를 낳았다.
그들은 첫째 나무로 만들어진 여물통, 구유를 정성껏 닦았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를 그 안에 뉘었다.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그 밤, 멀리에서 온 박사들과 양치는 목자들이 그 외양간을 찾아왔다.
그들은 그 구유 속의 아기를 경배하는 게 아닌가?
아~ 내가 세상의 어떤 보석에 비할 바 없는 귀한 그분을 담는 상자가 되었구나.
내가 소원했던 것과는 감히 비교 못할 것을 주셨구나.
둘째 나무인 갈릴리 고기잡이배에 한 사람이 탔다.
그분이 하늘나라의 비밀을 말할 때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귀 기울였다.
그분은 풍랑이는 파도를 잠재웠다.
비록 비린내 나는 작은 배이나 세상에서 가장 귀한 왕을 태우는 자랑스러운 배가 되었다.
이렇게 되리라곤 누가 감히 꿈꿀 수 있었을까?
셋째 나무.
통나무 더미에 무료히 얹혀있던 그가 어쩌다 한 죄인의 십자가 형틀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그 죄인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2천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내 모습의 십자가로 그분을 기억하게 될 줄이야 내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냐고?
기가 막힌 일이다.
정신지체아 아들을 출산하고 나는 그분 앞에 엎드렸다.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
정상 지능이 되게 해 주세요.
이런 상태로는 인생 살기 힘들어요.
무슨 주님의 영광 나타낼 수 없잖아요..."
오랜 세월, 어두움이 아직 걷히기 전, 우리 부부는 그분에게 나아갔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장애인.
기도로 정상인이 될지도 모를 애를 특수학교에 입학시키면 진짜 장애인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버티다가 결국 특수학교에 입학시켰다.
특수학교 고등부까지 다녔다.
그래, 염색체 이상을 사람이 어떻게 바꾸나?
차라리 달나라에 우주인을 보내기가 쉽지.
애초에 염색체 이상인 아들을 정상인으로 바꾸게 해 달라는 기도가 억지였지.
말도 되지 않은 일.
꿈은 무슨...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교직에 있었다.
결혼 후 이런저런 사정도 있지만 장애인 아들의 출산과 돌봄으로 교직으로 복귀는 불가.
내가 종종거리며 아들을 머나먼 곳에 있는 특수학교로, 태권도장으로, 미술학원으로 데리고 다니고 있는 동안, 동창들은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었다.
뒤늦게 신학교를 아슬아슬하게 다녔다.
아이 학교가 쉬는 날이면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아들은 엄마학교에 함께 등교.
엄마가 수업하는 동안 아들은 도서관에서 그림을 그리며 엄마를 기다렸다.
초등학교 아들은 그 당시 열쇠로 여는 현관문을 스스로 못 열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스쿨버스로 일찍 귀가하는 날은 엄마는 수업 도중, 왕복 한 시간 거리의 집으로 와 아이를 케어하고 다시 학교로 갔다.
졸업 후 교회에서 일할 때도 오랫동안 파트 사역이 한도였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얼른 엄마가 귀가해야지.
주일, 엄마가 일하는 동안에 아이는 교회사무실 한편에 마련한 작은 책상에서 성경을 필사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이후 엄마가 전담으로 일할 때도, 아들이 스쿨버스로 집에 잘 도착했는지, 태권도장에 갈 준비는 했는지, 미술 선생님 집에 택시로 잘 도착했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
내가 매일매일 아들을 돌보며 교회 일을 종종거리며 하는 사이, 신학교를 졸업한 동창들은 어엿한 중견 목사님들이 되어있었다.
내 처지에 교회 일은 무슨...
이른 새벽,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 내 처지는 한도가 있고 아들의 지능도 변함이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
집 가까이 소년원이 있었다.
7~8년 동안 주 2~3회, 3중 철문의 그 안에 기적적으로 들어가 봉사할 수 있었다.
영어 검정고시, 성경공부, 개인 면회, 상담, 성가대 조직, 세례 준비 등으로 들락날락했다.
신학교 동창들은 교회에서 충분한 사례비를 받으며 일할 때, 파트 사역자의 나는 시간이 빌 때 그곳에 갔다. 봉사지만 나의 천직 삼아.
자비로 성경, 검정고시 교재, 간식 등을 챙겨갔다.
일반학교의 교사를 나는 할 수 없지만
갇힌 자의 교사는 할 수 있었다. 시간을 조정하면 되니까.
어느 날 소년원이 없어졌다.
죄가 발각되어 갇힌 어린 그들.
발각되지 않은 죄인인 나.
감사하지,
감사해서 내 돈 들여 그들을 만났는데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내가 쓴 돈의 수십 배를 갚아주셨다.
감사패들과 법무부장관상이 남겨졌다.
무엇보다, 돈으로 힘으로 안 되는 세례를 수십 명의 갇힌 그들이 받도록 하셨다.
몸은 갇혔으나 영은 자유로운 자가 되게 하셨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한 아들의 장애.
어느 날 개인전을 가졌다.
사실 이 애가 그림을 시작한 건 엄마 사정 때문.
엄마가 이런저런 일로 늦게 귀가하니 하굣길에 동네 미술 학원으로 가서 엄마를 기다리게 할 목적이었다.
그러는 동안, 쌓인 그림들. 대부분 성경 이야기들.
제 또래 정상아이들은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는 시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시간은 있는 아들은 대부분 성경그림을 그렸다.
공모전에도 입상하게 되고 기독교미술가 협회 회원도 되어 정기전에도 출품한다.
첫 번째 개인전시회 후 9년이 흐르고 두 번째, 그리고 얼마 전 세 번째 전시회.
코로나로 불안한 시절, 두 번째 개인전을 가졌을 때.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며 꽁꽁 집안에 숨어 있던 시간.
돈을 들이고 여러 손길의 도움을 받아 전시회는 열지만 관객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일주일간 이백 명 정도 오면 다행이지.
그러나 기도 중, 하나님은 계속 진행하라고 하셨기에 기쁜 마음으로 시작했다.
역시 코로나 시기였다. 드문드문 오는 관객.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그분의 계획을.
사람통행은 제한된 시기에 전파는, 인터넷은 오히려 더 활발했다.
전시회 소식이 매스컴을 타게 되었다!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장애인 화가 '
오랫동안 교류하던 선교단체 목사님께서 연결해 주셔서, KBS 9시 본방과 지역방송에 전시회가 하루 세 번 소개되었다.
또 다른 방송과 몇몇 신문에 나왔다.
이후 인터넷 몇 군데에 실렸는데, 조회수를 합하니 거진 4~5천이 되었다.
방안에 팽개쳐 있던 그림들.
지능 49인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지능 49인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만의 그림들이 세상에 나왔다.
"보세요, 우리가 보기에 부족한 사람도 나름 무언가는 할 수 있답니다."
"보세요, 지능이 낮다고 꼭 불행한 건 아니지요. 나름 행복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지능이 낮아도 하나님을 즐길 수 있지요."
대단하지도 않은 아들의 그림.
그러나 나에게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지나고 보니
꿈을 꾼 이는 하나님이셨다.
가정, 학교,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년원에 갇힌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그분.
그 아이들을 도우시려는 그분의 꿈.
대신 부족한 나를 그곳에 보내셨다.
세상에서 보잘것없이 보이는 아이라도
주님을 즐길 수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그분의 꿈.
대신 부족한 나의 아이를 쓰셨다.
내가 고군분투하며 여기까지 왔다면
나의 꿈을 이룬 것이겠지만
이런 과정에서 사람의 노력으로는 안 되는 여러 가지 희한한 일을 겪었기에
더욱 그렇다.
섭리!- 그분이 미리 준비하심.
예컨대
내가 소년원에 들어갈 뜻을 품고 이리저리 들어갈 루트를 알아보았을 때 어느 소년원 직원이 하신 말,
"안 돼요. 그렇잖아도 어느 기독교인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켜 골치 아픈 판인데..."
그런데
그때 내가 다니던 대학원, 상담학교수님.
종강회식 후 귀갓길, 그분과 우연히 같은 차를 탔다.
" 공부하고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시냐?"
"저는 소년원에 들어가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그래요? 그곳 원장이 내 친구인데..."
몇 번 거절당했던 그곳.
교수님 전화 한 통으로 이번에는 그곳 원장님의 환대 속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일.
이 삼십 년 간 기도하며 아이의 미술을 지도해 주신 선생님.
선생님이 아니라 이모가 되어버린 분.
그녀의 남편은 알고 보니 내 남편과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
생각해 보니
양 손가락이 붙어 태어난 아이를 두어 살 때 아빠 따라 파리로 가게 하시고 그곳에서 수술을 받게 된 일.
거진 무료로.
그 또한 그분의 큰 계획을 위한 작은 계획.
하나님께서는 선한 꿈을 가지고 우리를 세상에 내 보내셨다.
그분의 꿈을 차근차근 이루어 가신다.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을 통해.
많은 돕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람은 기적이고 우연이라고 하나
그분은 필연인 사건을 통해.
내 방식이 아닌 그분의 방식대로.
내 시간이 아닌 그분의 시간에.
시간이 흘러 마침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빌립보서 2장 13절)